[030] 달콤 시큼 쌉싸름한 열병의 맛

by 은도

통창으로 한기가 새어들던 어느 아침,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깔깔한 감각. 침을 삼켜보았다. 마른 부직포끼리 붙었다 떨어지는 듯한 버석한 통증이 느껴졌다. 감기다.


감기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것도 하필 할 일도 많은 바쁜 시기만 골라서. ‘차라리 열병에 걸렸으면’하는 마음으로 찬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 땐 끝내 찾아오지도 않던 그것은 내가 원치 않은 날, 예고도 없이 왔다.


[030] 먹구름.jpg 제주시 연동


간신히 주말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평일 이틀을 앓아누웠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켜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뜨끈한 전기장판과 이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감기 기운에 정신이 몽롱해져 갈 때쯤 왠지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미지의 강력한 힘이 밑에서 끌어당기는 듯 한없이 묵직한 몸의 무게, 동시에 공중으로 붕 뜨는 듯한 모순적인 간극에서 오는 아뜩한 느낌. 어릴 적 열병에 걸리면 느끼던 감각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 때면 현실은 아득히 멀어지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 광활한 틈새에 갇혀 헤매는 듯했다. 그 낯선 느낌에 공포와 불안감이 깊어질 때쯤 나를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오는 손길이 있었다. 어둠 속 내 이마를 짚던 엄마의 손길. 그 온기가 피부에 스며들면 불안감이 스르륵 사라지고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아,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구나’ 해서.


엄마는 비몽사몽 하던 나를 반쯤 일으켜 세워 내 입에 숟가락을 밀어 넣곤 했다. 숟가락에 담겨있던 끈적한 액체는 달콤, 시큼, 쌉싸름한 맛을 풍겼다. 깔깔한 입안을 촉촉하게 감싸던 오렌지 맛 시럽, 그 시절 열병의 맛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앓은 감기는 잊고 있던 그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감각, 나를 이 세상에 발붙이게 만들어주던 그 안정감.


그땐 아프면 마음 놓고 앓기만 할 수 있었다. 밥을 챙겨주고 약을 먹여주고 한밤중에도 나를 찾아와 이마를 짚어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므로. 그러나 혼자인 지금, 그 두 가지 역할은 모두 내 몫이었다. 앓는 나와 그런 나를 챙기는 나, 둘 모두를 해내야 하는 웃픈 아이러니. 침대에 누워 정신없이 앓다가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끼니를 챙기고 약을 먹인 후 다시 뉘어야 했다. 어쩐지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030] 북촌리 고양이.jpg 제주시 북촌리


가족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멀어져 잠시 혼자이기로 선택했지만 혼자인 삶이 익숙해질수록 이 평온을 깨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생긴다. 다시 누군가와 살을 부딪고 마음을 맞대고 사는 삶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숨 쉬게 했던 고요한 이 방이 과연 훗날에도 나를 살게 할 수 있을까? 때때로 찾아올 공허가 내 숨을 막고 깊어질 외로움이 나를 결국 시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두운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달궈진 몸, 의식과 무의식의 틈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나를 상상하며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던 건, 아직 남아있던 감기 기운 탓이었을까.

꼬박 이틀을 앓고 난 뒤 눈발 흩날리던 어느 날, 아늑한 카페를 찾았다. 아직 목구멍이 따갑고 입안이 깔끄러웠기에 커피 대신 뱅쇼를 주문했다. 유리잔에 담긴 따뜻한 와인빛 액체를 한 모금 머금었다. 과일의 달콤한 맛이 혀에 닿고, 레몬의 시큼한 맛이 퍼지고, 와인과 계피의 쌉싸름한 맛이 남았다. 달콤, 시큼, 쌉싸름한 맛. 오래전 느낀 열병의 맛과 닮아있었다.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입안에 감도는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