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다는 다양한 얼굴을 품고 있다. 활기차고 변화무쌍한 동쪽 바다, 따뜻하고 낭만적인 서쪽 바다, 깊고 거친 남쪽 바다, 여행의 설렘과 떠나는 이의 아쉬움이 공존하는 북쪽 바다, 너무 다르지만 모두 제주가 품은 얼굴이다.
과거, 여행으로 제주를 찾았을 땐 서쪽 바다를 좋아했다. 일행과 노을을 바라보며 추억을 남기기 딱 좋은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홀로 제주에 내려온 후로는 동쪽 바다에 더 마음이 간다. 동쪽에는 함덕, 김녕, 성산 등 관광지로 유명한 바다들이 많지만,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바다를 찾는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고요를 느끼고 싶을 때, 그럴 때 찾는 나만의 바다가 두 곳 있다. 꽁꽁 숨겨두고 나만 알고 싶었던 그곳을 바다의 고요가 필요할지도 모를 당신과 나누어볼까 한다.
당신은 북촌리 도롯가에 위치한 작은 분식집 ‘동그레’ 앞에 서 있다. 식사 전이라면 그곳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나와도 좋겠다. 정갈한 당근 김밥과 동글동글한 떡 강정이 꼭 그 동네를 닮았으니 말이다.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한층 여유로워진 마음을 안고 골목길로 내려가 본다.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걷다가 문득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싶을 때쯤 예쁜 벽화가 나온다. 벽화가 안내하는 대로, 풍경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거닐다 보면 어느새 시야가 밝아진다. 그곳은 ‘북촌포구’, 작은 배들이 가지런히 떠서 꿀렁대고 있다. 포구를 왼쪽에 두고 동쪽으로 걸어본다. 걸음을 옮길수록 시야가 트이고 감춰져 있던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눈높이에 펼쳐진 바다는 잔잔하다. 파도마저 점잖게 부서진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고요한 공기, 느려지는 시간 감각,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이 비워진다. 다음 일정도 잊은 채 한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어느덧 해가 저만치 넘어가 있고, 바다는 노란빛으로 물든다. 걸음을 돌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낯설었던 북촌리가 몽글몽글한 느낌으로 자리한다. 마치 잃었던 고향처럼.
마음이 복잡한 걸 넘어서서 생각이 뒤죽박죽 아무렇게나 엉켜있고 감정은 끝을 모르고 내려앉는 어느 날, 당신은 동남부에 있는 어느 바다로 향한다. 성산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나오는 생소한 동네,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이다. ‘신풍 신천 바다목장’을 검색하고 도착하니, 발밑 아래 깊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시원한 바다를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옮긴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바다를 왼쪽에 두고 걸어본다. 짙은 푸른빛 바다,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 거센 바람을 느끼며 30분쯤 걸었을까, 고적한 정자 하나가 보인다. 그쪽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아 본다. 거친 바다에 빨려 들어갈 듯 멍하니 있다 보니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가는 나뭇가지들은 속절없이 흔들린다. 어쩐지 긴장되고 무섭고 두려운 느낌이 들지만, ‘이만 돌아갈까?’ 고민하다 그냥 드러눕는다. 눈을 감고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정처 없이 떠다녀 본다. 그러자, 엉킨 생각과 무거운 마음은 잘게 부서지고, 당신은 그저 살아있음에 경이를 느끼게 된다. 어둑해진 바다를 등 뒤에 두고 돌아가는 길, 신천리 바다는 이미 당신의 깊은 상흔을 덮치고, 그 자리에 흐르고 있다.
나는 두 바다에서 고독을 느낀다. 두 바다의 결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 고독을 삼킨 채 묵묵히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북촌리 바다는 담담하고 여유롭게, 신천리 바다는 역동적으로, 주어진 운명을 살아낸다.
가끔 고독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당신의 고독의 결을 따라 두 바다 중 한 곳을 찾아보면 좋겠다. 그곳에서 바다의 고독을 바라보며 당신의 고독을 마주해 보는 건 어떨까. 바다의 오랜 고독이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수없이 부서지며 짙어진 푸른빛이 다정으로 다가올 것이다. 바다를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창백한 온기는 당신의 마음 한편에 작은 진주알처럼 놓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