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특별상을 받은 글을 읽었다.
이혼에 관하여 쓴 글이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글과는 결이 달랐지만, 묘한 힘이 있었다. 문장은 간결했고,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어 술술 읽혔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가 또렷하게 다가왔다. 아 이것이 읽히는 글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Q&A도 읽었다.
‘(이혼에 관한) 글이 이렇게나 덤덤하고 담백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실제로는 더 큰 감정기복을 겪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건 작가로서의 의도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서, 감정의 변화는 독자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고, 감정의 기폭은 낮추는 방식으로 풀어봤다’고 답하고 있었다.
작가로서의 의도라.
나는 최근 글 쓰는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야심 찬 시도를 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의도'를 고려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까지가 나의 숙제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남의 이혼사를 단숨에 읽어 내린 이른 아침,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살면서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쓴 글은 '재미로 쓴 웹 소설 몇 편과 블로그, 페이스북의 짧은 단상들, 대학 리포트와 교내 백일장 당선작품' 정도다. 논문을 썼으면 적성에 맞았을 것 같은데 예술대학 음악전공자의 졸업작품에는 논문이 필요 없었다.
대학시절 취미로 쓴 웹 소설은 오직 재미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와 캐릭터 묘사에 공을 들였다. 수치심도 없던 시절이라 거침없이 쏟아냈던 연재물들은 "난 ㄱ ㅏ 끔 눈물을 흘린ㄷ ㅏ... " 같은 감성을 지닌 로맨스, 아니면 해리포터 스타일의 요상한 판타지였다.
졸업 후에는 블로그와 SNS를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글을 읽는 이가
'와 똑똑하다'
'와 잘 쓴다'
'와 멋있다'
-라고 생각하길 바라며 글을 썼던 것 같다.
난해한 구조와 화려한 단어들로 구성된 시크하고 지적인 문장들. 내가 생각하는 '잘 쓴다'는 그렇게 편협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좀 더 알맹이에 대해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을’ 쓸지에 매몰되어 ‘어떻게’ 쓸지를 고민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되길 원하는가? 간결하고 담백하게 술술 읽히는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일단 확실한 건, 폼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우디한 향이 폴폴 날 것 같은 스타일리시한 글 말이다.
그런 글을 쓰는 작가를 몇 안다.
나의 소설가 취향은 확고한 편인데 ‘섬세하고 통찰력이 있는 차분한 아저씨들’을 좋아한다. 그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가장 많이 읽었다. 소설을 거의 읽지 않게 된 요즘도 종종 꺼내 보는 작품은 하루키의 것들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스토리와 구조, 상징, 거기 담긴 거대한 감정선 등에 감탄하며 빠져들지만 언제나 일차적으로 나를 낚는 것은 그의 문체와 스타일이다. 그의 글은 시각적이고 미니멀하고 은유적이다. 엄청 폼이 난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 또한 비슷한 것을 추구하고픈 욕망이 있다. 하지만 미니멀은 애당초 글렀다. 퇴고를 하면 내 글은 점점 불어난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한번 고치고 나면 1000자씩 늘어나있다. 미니멀한 문체를 추구한다면 퇴고를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다.
담고자 하는 감정은 은근하게 숨겨두고 싶다.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건조하고 복잡한 사실적 문장들의 바리게이트 뒤에 비겁한 변태처럼 숨어있고 싶다. 표현하고 싶은 감정들은 여기저기 몰래, 슬쩍, 뭍혀놓고 천천히 냄새를 풍기게 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것을 그저 은은하게 맡으며 왠지 멈추지 못하고 읽어나갔으면 하는 것이다. 적어놓고 보니 아주 난해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그렇게 미니멀한 글쓰기에 나날이 실패하고 있다.
잘 읽히는 글은 미니멀해야만 할 것만 같은데 이외수 선생님의 글쓰기 책도 내게는 소용이 없다. 끝없이 달리는 사족과 덧칠하는 음영, 번쩍이는 형용사의 일렬종대가 그냥 나 그 자체인 것 같다.
생각의 맥시멀리스트가 어찌 미니멀한 글쓰기를 하겠는고.
과연 잘 읽히는 글은 미니멀해야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