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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Jun 04. 2024

나의 경추 5,6번을 너에게 바친다


“팬시님이시죠?”



나흘간의 심사포비아를 치유해 주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군가에게 아티스트 네임으로 불리우는 것만으로 마음이 신선해진다. 4년 만에 음원의 정식발매가 결정됐다.


음원유통사는 5월 안에 곡을 발매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유일하게 한 자리 남아있던 29일 정오를 내어주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발매계약 체결.


단, 7일 만에 믹스마스터링과 커버아트웍을 만들어 내야 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일단 신났다.


이제 믹마를 해내면 나는 완전체가 된다. 음원을 발표할 때 필요한 모든 공정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닝겐이 되는 것이다.





어설픈 완전체

나의 첫 셀프 믹싱, 마스터링을 마치며 ’ 이것이 바로 해탈인가 ‘ 하는 기분을 느꼈다. 맘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지만 과감하게 흐린 눈, 아니 흐린 귀를 했다.


이 단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나는 또 몇 년이고 나의 곡들을 서랍 속에 숨겨 둔 채 발매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꾸준히 음악을 발표하고 싶다면 이제는 직접 믹싱과 마스터링을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첫걸음은 하염없이 어설프지만 참아내야 한다.


정말 PTSD 올 것 같은 믹싱 마스터링을 마쳤다. 한정된 내 능력은 생각지도 않고, 이 노래는 무조건 5월이 가기 전에 발매해야 한다며 타이트하게 날짜를 잡은 과거의 나를 격렬하게 욕한 후, 음원을 넘겼다.



팬시의 새 싱글 'PTSD' 와 나의 뮤즈 '삐덕이'


자발적 속성 2D 애니메이터 실습

이제 발매는 딱 2주 남은 시점. 14일 안에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내야 했다.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현타가 왔지만, 아무튼 미션은 시작됐고 난 해내야 했다.



노래의 주제는 ’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두려움‘

몇 달 전부터 이모티콘 작가가 되겠다며 열심히 그리고 있었던 캐릭터 까칠한 ’삐덕이‘가 마치 노래의 주인공인 듯 찰떡이었다. 삐덕이의 전신샷과 손글씨로 앨범커버를 후다닥 해치우고, 걷기 애니메이팅을 시작했다.


처음엔 삐덕이가 걸어가는 애니메이션을 짧게 만들어서 무한루프 해놓고 가사 비디오를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점점 욕심이 생겼다. 걷고 있던 삐덕이가 핸드폰을 꺼내 쳐다보는 애니메이팅을 스타트로 영혼의 노가다가 시작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한술 더 떠 지금 날씨가 좋으니 공원에서 배경 소스를 찍어 삐덕이를 그 위에 올리면 좋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날 정말 날씨가 너무 좋아서 땡볕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걸어 다녔다. 애플워치는 운동 중이신 것 같다며 오늘의 운동 링을 다 채웠다고 나를 칭찬했다.


그렇게 완성된 삐덕이의 산책 애니메이팅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연쇄적으로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창밖에는 봄이 와있고 나는 아직 숨어있지 ’라는 도입부 가사를 표현하려면 작업실 안에서 외롭게 뒹굴거리는 삐덕이로 벌스를 시작하고 후렴에서 산책을 하면 딱이겠다 싶었다.


나는 당장 챗GPT를 열고 달리에게 뮤지션의 아늑한 작업실을 그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맘에 드는 작업실이 나올 때까지 디테일을 수정하며 하루 종일 수십 장의 작업실 이미지를 만들었다. 달리는 ‘너무 빠르게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며 종종 뻗었다.


오픈 AI의 생성 이미지는 슬쩍 보면 굉장히 그럴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투시나 그림자 표현 등 디테일이 엉망이다. 말이 안 되는 장면들이 잔뜩 섞여 있는 그림을, 사진가 남편에게 넘겼다. 그는 포샵으로 마법을 부려 삐덕이의 연보라색 작업실을 뚝딱 완성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일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1절을 완성하고 나니 이번엔 1,2절을 똑같이 반복하는 게 아쉬웠다. 좋아 1절은 산책, 2절은 운전으로 하자! 아이디어가 나오자마자 또다시 운전하는 삐덕이를 그리며 낄낄거렸다.

이쯤 되자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는 브릿지 파트도

그냥 둘 수 없었다. 어느새 나는 한 마리 거북이가 되어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경추 5,6번 사요나라

그리고 발매 3일 전,

극심한 통증과 함께 기어서 병원에 갔고 경추 5번과 6번 디스크가 탈출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오른팔을 전혀 쓸 수 없었고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는 격렬한 고통. 하지만 나에겐 뮤비 마무리와 발매 관련 잡무들이 남아 있었다.


신경차단술을 받으며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후, 집에 돌아와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누워만 있었다. 하지만 그 누운 상태에서 나의 모든 모바일 기기를 사방에 거치해 두고 살아남은 나의 왼손을 바쳐 발매에 필요한 모든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하고야 말았다. 4년 만의 정식발매는 무사히(?) 이루어졌고 삐덕이는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나는 디스크를 잃었다...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지금도 누워서 음성 메모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는 것일까.

철학적 고민에 빠진 채 보고 또 봤던 삐덕이 브이로그 뮤비를 엄마미소로 무한반복하고 있다. 잠시도 생각을 멈출 수 없고 잠시도 온전히 쉬기가 힘든 이런 나 자신이 스스로도 때론 안쓰럽고 광인 같다. 뭘 위해 이렇게 매번 몸을 혹사시켜가면서 매달리게 되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성격장애 거나 고쳐야 할 신경증은 아닌지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만든 소리, 감정, 이야기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관에 집중할 때 나는 잠시 행복하다는 것이다...



나의 뉴진스 삐덕이... 데뷔 축하해...

나의 경추 5,6번을 너에게 바친다...

세상아... 들어올 거면 맞다이로 들어와...


https://www.youtube.com/watch?v=IobAqLWzojc

FANXY (팬시) - 'PTSD' official 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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