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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드림 Aug 11. 2022

나에게만 들리는 세탁기 알람

빨래를 널면서 드는 짧은 단상


일을 하고 있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때는 일을 하다가 중간에 끊고 집안일을 해야 할 때다.


열심히 집중해서 뭔가를 쓰고 있거나 읽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밥을 차려달라고 할 때나 세탁물이 다 되었다고 빨리 꺼내 달라고 알람이 울릴 때이다.


그럼 온갖 집중하고 몰입하던 것을 깨고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집안일이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싫지만 해야 하는 내 일이니까.


남편이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컴퓨터를 켜고 뭔가 열중해서 읽고 쓰고 하는 중이다.

나 역시 옆에서 컴퓨터를 켜고 곧 공저로 독립출판을 할 원고를 퇴고하고 있다. 마감이 있기에 급한 마음에 초집중하면서 틀린 글자가 없는지 어색한 문장이 없는지 살피고 있다.


똑같이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다. 세탁기가 자신의 일을 다 했다는 알람을 띵띵 울린다. 빨리 꺼내 달라고 소리를 내고 있지만 반응하는 사람은 나다.

집중하며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을 끊고 일어서는 일은 매번 짜증이 난다.

벌떡 일어나 곧장 베란다실로 가 신경질적으로 세탁물을 꺼내면서 갑자기 드는 단상.


왜 이럴 때 남편은 일어나지 않는가.

같이 일을 하고 있었고 세탁물의 알람은 나만 들었단 말인가.

세탁물을 꺼내서 너는 일은 온전히 내 일인가.

남편도 이런 집안일은 당연히 내 일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거 아닐까.

아마 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탁기의 빨래는 꿉꿉한 냄새를 풍길 때까지 이 안에 있었을 것이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면서도 남편은 나를 보지 않는다. 자신의 일에 빠져 열중하고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찾고 키보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남편이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한가.

하기 싫은 집안일을 내가 하는 것이 언제부터 당연한 일이 되었는가.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가, 남편과 아내의 역할의 차이인가.

원망의 눈초리가 남편의 등 뒤에 가서 박힌다.


한 마디 날카로운 말을 골라 던지고 싶으나 그것조차 뭔가 옹졸해 보여 그만 포기한다. 그깟 세탁물 하나 꺼내고 너는 일을 가지고 얼굴 붉히고 싶은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이 귀찮고 성가신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다면 남편은 어쩌면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물론 짜증 섞인 얼굴을 했겠지. 하지만 나의 바람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벌떡 일어나기를 바란다. 혹은 소리를 듣고 내가 할까라는 말이라도 해주길 바란다.


당연히 그것은 당신의 일이니 네가 처리하도록 나는 가만히 있겠다는 태도(물론 남편은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었겠지)에 실망을 한다.


빨래를 다 널면서 나의 이 작고 옹졸한 억울함을 어떻게든 털어 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끝내 말끔하게 털어내지 못한 텁텁함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남편 옆으로 가 컴퓨터를 다시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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