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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Sep 11. 2022

댁네 냉장고는 안녕하십니까?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목이 길고 하얀 새 한쌍이 날고 있었다. 도심에선 좀처럼 보기 드물게 크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것이 두루미나 백로급으로 보였다. 우아한 날갯짓을 뽐내는 어미새가 앞서 날고, 조금은 서툴파닥이며 새끼 새가 뒤를 따라 날았다. 어미는 이따금 둥근 동선을 그리며 돌아와 새끼 곁을 살폈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마주 보며 춤추듯 날았다. 이윽고 어미는 때가 되었다는 듯 새끼를 등지고 높은 곳을 향했다. 이에 부응하듯 작은 새도 씩씩한 날갯짓으로 창공을 향해 멀리 날아갔다. 둘의 간격은 점차 멀어졌다. 이제는 서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미는 더 이상 벌레를 물고 새끼를 찾지 않을 것이다. 다 자란 새는 자기 만의 세상으로 날아가 새로운 둥지를 짓고 먹이를 다툴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준엄한 자연의 섭리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우리 집 명절은 며칠 전에 지냈다. 먼 곳 지방으로 각자 독립해 사는 아이들 일정에 맞춰 추석과 기념일을 겸해 다녀갔기 때문이다. 엄마인 나는 음식 솜씨도 없고 직장일에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어쩌다 아이들이 집에 올 때주로 외식을 베풀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엄마 노릇을 너무 쉽게 생각하나?' 스스로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끼니 때면 가끔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남의 집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냄새에 군침을 흘리며 들었던 생각이다.


아들의 귀향을 상상한다. 흔하고 식상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설정이다.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그를 반긴다. '앗, 이것은 어릴 때 엄마가 늘 해주던 바로 그 냄새.' 입맛을 다시며 숟가락을 다. '바로 이 맛이야.' 세상 시름은 잠시 내려놓고 어릴 적 천진한 얼굴로 돌아와  맛난 음식들을 뚝딱 비워낸다. 

무려 30년 차 엄마로서 이 정도 식탁풍경쯤은 식은 죽 먹기로 연출해야 하지 않겠나. 마침 휴직 중인 지금기회다 싶었다. '이번에는 집밥이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만들어줬던 요리 중 딱히 아이들이 열광했던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들은 식탁에서 어쩌다 입에 맞는 음식을 만나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엄마, 이거 산 거야?" 맛있다는 표현이 그런 식이었다.


다양한 집밥 메뉴를 머릿속에 그리며 쇼핑을 시작했다. 대형 마트와 동네 5일장에도 고 집 앞 편의점을 들락거리며 먹거리를 사들였다. 고기와 야채 생선뿐 아니라 과일이며 빵과 과자류, 아이스크림 등 간식까지 갖추다 보니 널널하던 냉장고가 꽉꽉 채워졌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하고 빠진 것 같아 자꾸만 뭘 더 사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아하 그랬구나. 그땐 왜 몰랐을까?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 냉장고가 그랬다. 문을 열면 쟁여진 음식 통들이 무너지거나 정체불명 봉다리가 낙하할 만큼이었다. 육해공 고기류는 물론 각종 진기한 소스류, 젓갈, 지방 특산물 등 총망라한 식재료들과 음식이 가득했다. 냉장고 밖에는 슈퍼를 쓸어왔음직한 불량스러운 과자류며 간식거리가 수북했다. 의기양양한 어머니 말씀이 귓전에 선하다. " 우리 집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어머니 집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하루 종일 배가 불러 있었다. 떠날 때면 남은 음식들을 바리바리 챙겨 주셨다. '당신은 소화불량에 지병도 있어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는데 왜 저렇게 많이 쌓아놓고 사시나...' 어머니 스타일이 현명치 못해 보여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땐 몰랐다. 투박한 어머니 그 뒤에 숨은 사랑의 노고를. 자식들의 입맛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전전긍긍하셨음을 내 아이의 집밥을 준비하면서 깨달았다. 나도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녀석들은 준비해 둔 음식 중 반의 반도 먹지 않고 돌아갔다. 한 녀석은 딩굴딩굴 잠만 자느라, 한 녀석은 간헐적 단식을 실천 중이라며 안 먹었다. 재차 권하는 내게, 아침을 정 차려주고 싶으면 차를 한잔 달란다. 아뿔싸, 차만 없고 다 있는데. 커피만 좋아하다 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차들을 몽땅 버렸는데. 엄마의 허점을 잘도 짚어낸다. 참 얄밉기 짝이 없다.

예전 내 어머니처럼, 나도 남은 음식들을 보냉 가방에 살뜰히 챙겨 넣어 그들 손에 들려주었다. 집을 나서는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저 많은 거 언제 다 먹을 거냐고, 양질의 음식을 조금씩만 준비하라고, 엄마도 근육을 챙겨야 건강할 수 있다고 아이가 말했다. 잠만 자던 녀석은 "집에 오면 왜 이렇게 잠이 오지?"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또 엄마랍시고 혹시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았는지 되짚어 보았다.


즐거운 만남이었다. 나보다 어느새 훌쩍 넓고 높아진 그들의 어깨가 아기 두루미의 파닥이던 날개만큼이나 대견해 보였다. 아직은 서툴지만, 그들의 날갯짓은 점차 더 멀어질 것이다. 새는 새의 순리로 인간은 인간의 방식대, 때가 되면, 각자 삶을 향해 방향을 틀어 나아간다.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마음으로 응원할 뿐, 나도 어미새와 다를 바 없다. 그처럼 쿨하진 못해서 조금은 끈적이더라도.


올 추석도 달은 차오르고, 우리네 냉장고도 점점 차오른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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