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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Jun 07. 2024

이까짓 흰머리



삐죽하게 올라온 흰머리를 눈썹 손질용 가위로 자르느라 집중하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욕실문도 꽉 닫혀 있는 데다 용을 쓰느라 몸에서 열이 났는지 인중 위로는 땀방울이 맺혔다. 거울 속 녹초가 된 얼굴을 보는데 ‘내가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짜증이 솟구치더니 몇 년째 이틀에 한 번은 반복해오고 있는 이 작업에 갑작스레 실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손톱을 깎듯 습관처럼 해오던 일이지만 한 번 귀찮다 여기고 나니 한 시간 내내 흰머리를 찾아대느라 들고 있던 두 팔도 쑤시고 이 모든 과정이 하염없이 지긋지긋해진다.

‘아, 더는 못 해 먹겠다.’




이미 새치 수준을 넘어선 흰머리를 다른 색으로 염색하기 위해서는 짧게 자른 것을 어느 정도 기르는 편이 좋을 거라고 미용실에서 말했다. 염색을 시작했다가는 이제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뿌리 염색을 위해 미용실에 들러야 할터인데 그것은 그것대로 매우 귀찮아서 남들보다 많은 흰머리가 괜히 야속하다. 제멋대로 줄어드는 멜라닌 색소를 탓 한들 어쩔 도리도 없어 결국에는 흰머리는 으레 부끄럽고 감추어야 한다는 풍조에 불만의 화살이 돌아간다. 아니 흰머리가 뭐 어때서. 

이십 대에는 대체로 갈색 모발을 유지하다 임신을 준비하며 염색을 그만두었다. 자연 모발 상태로 지내다 보니 하나둘씩 늘어나는 빛바랜 머리를 발견할 때마다 눈썹용 가위를 들고 짧게 자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조치가 따로 없었는데 출산을 하고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뒤로도 이마라인부터 뒤통수까지 구석구석 뒤져가며 흰머리를 처리해 오다 보니 어느덧 팔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최근에는 잘라야 하는 양이 늘면서 꽤나 성가신 일이 돼버렸지만 처음에만 해도 수가 많지 않아서 머리를 감고 말리는 일만큼이나 빠르고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버렸다. 싫든 좋든 습관인 일이라 그만둔 후로도 한동안은 거울에서 흰머리를 발견할 때마다 자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데 염색을 하든 방치 하든 길러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서 눈 딱 감고 외면해 버리기 시작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자란 흰머리를 보고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굴 정도가 되었다.

지금 안쪽 흰머리는 제법 길었고 정수리 쪽이나 가르마 주변도 꽤 길어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삐죽삐죽 솟아있다. 이십 대에는 머리 색을 밝게 하기 위해 염색을 했는데 이제는 한다면 어둡게 해야 한다. 고작 십 년이 흘렀을 뿐인데 상황이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아마도 다음 십 년 후에는 노안이 오거나 예측할 수 없는 신체 변화를 겪고 있을 것이 아주 확실하다. 그러고 보면 앞으로 겪을 일에 비하면 흰머리쯤은 정말 별 게 아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곱슬머리를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펌도 해야 하는데 자르는 비용과 펌에 이어 염색에도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금액이 여간 아깝지 않을 수가 없다. 나중에는 탈모도 관리해야 할 텐데 머리 빠지는 것이 걱정이라면 역시 염색은 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돈도 아깝고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미용실을 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머리를 새롭게 하고 나면 기분 전환에 좋다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미용실 가는 일을 매번 억지로 해야 하는 숙제로 여기는 편이라 되도록 이면 자주 안 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디자이너와 나누는 간단한 대화가 부담스럽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몇 시간이나 한 곳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 것이 매우 못 마땅하다. 미용실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쓸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갈 때마다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 스스로도 별나다고는 생각한다. 

그동안 흰머리를 감출 생각만 했지 두피 건강에 대해서는 별 고민을 안 해봤는데 머지않아 탈모를 걱정할 나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몇 년 후가 아닌 지금에도 흰머리 따위는 거슬리지 않는다. 아이는 흰머리로 덮인 엄마 머리를 부끄러워할 수도 있으나 정작 나는 두피나 모발 건강에 더 관심이 크다. 마음먹은 김에 염색은 참고 두피 세럼이나 사서 발라보자 마음을 먹고 단김에 주문까지 해버린다. 충동구매라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염색하는 데에 드는 값보다는 싸다는 점이 나름 내세울 핑곗거리이다. 

흰머리가 늘면 나이가 들어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차피 잦은 염색으로 머릿결이 상하고 나면 아무리 열심히 빗질을 한들 깔끔해 보이지 않는 것은 매 한 가지 아닐까. 딱히 예뻐지고 싶거나 젊어 보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단정하고 깨끗해 보였으면 좋겠고 죽는 날까지는 몸을 아껴 쓰고 싶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읽은 *<쇼핑과 나-이세탄에서 사랑을 담아>에 의하면 돈모로 만들어진 빗이 머릿결에 좋다고 한다. 검색해 보니 가격이 거의 삼십만 원에서 사십만 원 가까이 가던데 빗 하나에 이렇게나 투자하는 것이 맞나 싶다가도 그 값이면 염색 네 번 하는 거나 비슷하니 오히려 빗은 몇 년은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싸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달에는 두피 세럼을 이미 구매해 버렸으니 네 달 뒤에도 염색 없이 잘 견디고 있을 경우 돈모 빗을 한 번 주문해 보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예정다. 염색은 한 번 시작하면 평생 한 달에 한 번은 해야 하는 거니 그걸 뒤로 미루는 것만으로도 괜히 돈을 아끼는 듯해서 그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니 뭐든 저렴하게 느껴지는 것이 조금 신이 나기도 하고 걱정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번 달에는 두피 세럼 하나로 끝났으니 결과적으로는 절약을 해내긴 한 셈이다. 



*<쇼핑과 나 - 이세탄에서 사랑을 담아> 야마우치 마리코 옮긴이 박선형 2023 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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