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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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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Jun 22. 2024

피망의 짝꿍 엔초비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 피망 여섯 개가 들어있다. ‘이게 다 얼마야?’ 싶어 놀랐는데 오천 원 밖에 안 한다. 한동안 두 개에 사천 원 조금 안 되는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모처럼만의 저렴한 가격에 횡재라도 한 기분이다. 요즘은 다른 채소와 마찬가지로 피망 역시 계절 상관없이 구매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제철에는 다른 계절보다 싼 가격에 많은 양을 살 수 있어 좋다.

피망을 즐겨 먹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한 번 맛있게 먹은 후로는 종종 생각이 나서 가능하면 떨어지지 않게 항상 사두는 편이다. 피망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니라서 우리 집 냉장고에는 대체로 피망과 함께 엔초비가 세트처럼 함께 들어가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피망보다 파프리카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샐러드 재료로 쓰기 좋고 구워 먹거나 볶아먹기도 좋아 파프리카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굳이 다른 양념이나 아무 조리 없이 생 파프리카를 잘라서 과일처럼 먹는 사람도 적지 않다. 채소치고 단맛이 많이 나고 아삭한 식감과 더불어 수분감도 많아서 사람뿐 아니라 강아지 중에도 즐겨 먹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 2> 이전에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었다. 거기에는 아이들이 싫어하는 채소로 브로콜리가 등장하는데 일본에서는 브로콜리 대신 피망이 나온다고 한다. 대부분 브로콜리를 꺼려하는 것과 달리 일본 어린이는 제법 잘 먹는 편이라 그 나라 아이들이 싫어하는 피망으로 대체했다는 후문이다. 그러고 보니 피망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어린이 캐릭터를 고르라면 일본 만화 속 ‘짱구’가 떠오른다.

어릴 적 가장 기피하는 채소 일 순위는 브로콜리도, 피망도 아닌 시금치였다. 그때만 해도 텔레비전에서 ‘뽀빠이’라는 만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엄마를 비롯한 여러 어른으로부터 뽀빠이처럼 튼튼해지려면 시금치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브로콜리는 아예 알지 못했고 피망은 피자 위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던 때였다. 그에 반해 시금치나물은 생일이나 명절이 아니어도 종종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이라 그 당시 싫어한 채소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시금치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 집 어린이는 의외로 시금치처럼 초록 잎채소로 만든 나물 반찬을 잘 먹는데 그 이유가 식감이 부드럽고 달아서라고 한다. 이른 나이에 시금치 특유의 단맛을 알다니 가끔은 나보다 나은 것 같다. 그렇지만 브로콜리나 피망은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먹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골고루 먹어주면 내 마음은 좋겠지만 요즘은 접할 수 있는 재료도 다양해서 균형 있는 영양소만 섭취할 수 있다면 선호하지 않는 채소는 조금 더 큰 다음에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서도 한참 동안은 피망을 즐겨 먹지 않았는데 몇 년 전 소셜미디어에서 한 레시피를 발견하면서 종종 따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콕 집어 피망을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 엔초비와 함께 볶은 피망 요리는 계절 상관없이 반찬으로, 혹은 안주로 만들어먹는다. 소셜미디어나 포털사이트에서 일본어로 피망요리를 검색하면 참치나 다짐육을 넣고 같이 볶아 만든 요리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엔초비는 피망 볶음 요리를 약간 변형시킨 버전인 듯한데 애초에 시작한 것이 누구인지는 모를 만큼 흔한 조리법인 것 같다. 엔초비에서 나오는 기름과 감칠맛 때문에 다른 재료는 하나도 더하지 않은 채 오로지 채 썬 피망과 엔초비만 넣고 볶으면 완성되기 때문에 만들기 수월한 요리다.

생선살이 완전히 부스러지고 파슬파슬해질 때까지 볶아서 먹는 것도 좋고 피망에 골고루 묻는 정도로 볶는 것도 좋다. 다만 어떤 엔초비를 쓰느냐에 따라 비린내가 날 수도 있어 생선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권하기 어렵다. 피망을 틀처럼 쓰고 그 안에 고기와 채소를 채운 채 달걀과 밀가루를 입혀 굽거나 튀기는 요리도 있지만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는 조리법은 평소에 자주 해 먹기 어렵다. 그에 반해 피망 엔초비 볶음은 두 가지 재료를 프라이팬에 넣고 볶아주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간편한 지 모른다.

피망과 파프리카는 생김새가 비슷하여 때에 따라서는 두 재료를 대체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막상 만들어보면 두 채소의 맛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다. 피망을 파프리카처럼 생으로 썰어먹지 않는 것처럼 엔초비와 볶음 요리를 만들 때 파프리카를 넣으면 수분이 많고 두꺼워 엔초비의 감칠맛이 구석구석 스며들기 어렵다. 게다가 오래 볶으면 흐물흐물한 모양으로 바뀌어서 식감도 좋지 않다. 차라리 피망이 비싸서 사기 어려울 때는 오이고추나 아삭 고추를 사서 대신하는 편이 낫다. 씹는 맛도, 살짝 느껴지는 매콤한 맛도 파프리카보다는 고추와 피망이 더 가까워 보인다.

피망은 온도가 높을 때 수확한다고 한다. 지금부터 가을 전까지가 피망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제철 시기인 것이다. 평소라면 잘 먹지 않는 피망이라도 해도 요즘처럼 저렴하게 살 수 있을 때라면 한 번쯤 엔초비와 함께 볶음 요리를 해 먹어도 좋지 않을까. 차가운 맥주와도, 시원한 와인과도 제법 잘 어울리는 안주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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