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감정과 극단적임에 관하여

2019년 1월2일

by 김은혜

나는 떡볶이와 소고기 돼지고기 치킨이 너무너무 맛있는데 선지나 닭 내장 같은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한다. 수박이랑 멜론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데 사과나 딸기는 안 먹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푹 빠져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줘도 좋을 정도이지만 누군가는 꼴도 보기 싫어서 나의 인간관계에 애매함이란 없다. 끊을 땐 단칼에! 뭐든 너무너무 좋아하고 싫은 건 진심을 다해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땐 내가 감정이 워낙 풍부해서 그런 줄 알았다. 감정이 남들보다 많아서 남들보다 훨씬 더 무언가를 사랑하고 더 열정적으로 싫어하는거다, 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극단적인 양가 감정, 유아적인 이분법적 시각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것이 그저 단순히 좋고 싫은 감정에 대한 것에만 그치면 모르겠는데,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까지 내린 많은 결정이 대부분 비슷한 모양이었다. 시간을 두고 본다거나 타협을 한다거나 여지를 남겨두는 것과 같은 선택지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한다, 아니면? 안한다. 회사를 다닌다, 아니면? 그만둔다. 팀장과 업무분담 조정을 한다거나 인사팀을 찾아가 부서나 사업부를 옮겨 달라는 요청 같은 것은 생각할 줄 모른다. 어차피 옮겨봐야 한 회사 안에서 그게 그거겠지 지레짐작 하면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를 시전, 용감하게 퇴사한다. 사람을 사귄다, 아니면? 헤어진다. 관계의 재고 따위는 없다. 사람 고쳐 쓰는거 아니고 다시 만나봐야 어차피 같은 이유로 또 틀어질 것이다.


참으로 모 아니면 도였다. 사람도 그렇고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편적일 수 없고 오히려 얼마나 입체적인데 나는 그저 내 시야에서 보이는 두 가지의 극단을 정해놓고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꽤 자주 해온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어떤 한 면만을 보고 나를 판단해 버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 했으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게 딱 그 꼴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안 맞을 수는 있지만 회사라는 큰 조직 안에 업무가 내가 하는 일 하나 뿐이겠나. 자리를 옮기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그저 시간만 좀 지나가도 업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거나, 업무의 내용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이리저리 조율하고 조절하느니 그냥 사표 던지고 나오는게 가장 편했던 선택이었던거다. 내심 스스로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다들 사직서 한 통 쯤 가슴에 품고 고민만 하지? 난 이렇게나 용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야!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책임감도 어깨에 이고지고 자리를 지키고 버티는 것이 더 큰 힘이 든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타인의 어떤 면이 나와 잘 안 맞을 수 있다. 왜 아니겠나. 우리는 이렇게나 다 다른 사람이고 하물며 가족이라는 사람들과도 안 맞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데 생판 남은 오죽하랴. 그렇지만 사람은 하나의 면만으로 이루어진 단편적인 무엇이 아니다. 인간이라함은 얼마나 입체적이고 복잡한 존재던가. 나만해도 변덕이 죽끓듯 하고 오늘은 이런 사람이었다가도 내일은 저런 사람이기도 하는데. 한 개인은 지극히 다면적이고 여러가지 성격과 성향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나쁜 사람도 없고 마냥 좋기만한 사람도 없다. 어렸을 때 보던 동화책에서야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했지만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다보면 사실 절대선, 절대악이라고 단정 지을수 있을만 한게 과연 존재하겠나 싶다. 살인자에게도 그 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고 위대한 성인이라도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한 인간을 그리 모질게도 잘라 냈던가. 정작 나도 누군가에게 완벽한 사람이지 못하면서.


무엇보다 이런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칼날이 결국은 나를 향한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어떤 때의 나는 다행히 만족스러운 구석을 보일 때가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자주 나는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무척이나 부족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와 쉽게 스스로를 비교하게 되고 그런 비교는 매우 빈번히 자기비하로 이어진다. 스스로가 아주 좋을 확률은 퍽 드물고 아주 미울 확률을 잔인할 만큼 높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생채기를 낸다.


많은 상처를 스스로 입히고 아물고를 반복한 뒤에야 나는 이제 조금 기다리고 두고 볼 줄 알게 되었다. 시간의 힘을 믿고 흐르기를 기다려볼 줄 알게 되었다. 지금 당장 A or B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좀 흐르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꼭 내가 결론을 지금 내려야만 하는 일인가?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스스로에게도 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의 나는 부족한 것도 너무 많고 난 왜 이렇지 싶은 부분도 있어서 속상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저절로 좋아지거나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가 무척이나 싫으니 그만 살자, 살아 뭐해 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나에게 시간도 기회도 조금 더 줘 볼일이다 하게 된다. 혹시 아는가. 시간의 흐름에 힘 입어 내가 조금 현명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고 몇 번 실패를 더 하다 보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마 그렇게 해서 얼마간이라도 조금씩 나아진다면 후에 변할 내 모습이 궁금해서라도 조금은 더 버티고 살아 봄직한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