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웠던 것이 어려워졌다. 이제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려면, 더 다양한 방식의 영감이나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더 싫은 건 아니다. 나름의 다른 장점이 있다. 그림은 그림대로, 시는 시대로, 글은 글대로, 대화- 깊고 얕은 모든 종류, 여행- 가깝고 먼 모든. 모두 효과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 때면 정체감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된다. 자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반복한지 꽤 되어서. 정체성이 선택에 큰 영향을 받는다면, 진정으로 선택하지 않고 만들어진 정체감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원인은 수많은 일들의 원인이 그러하듯 끝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드는 생각으로는, 자아라는 것이 끝없이 변동하는 것이라서, 그리고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라서. 삶과 세상이 그렇듯, 확정 지을 수 없는 것이라서, 그래서 끝없이 궁금해졌던 것 같다.
예술가라는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작품은 작가의 역사에서 오는 것일까?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예술가는 ‘행위’를 함으로써 작품을 만들고, 또 작품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상호적으로 예술가도 만들어진다. 수행 속에서 자기 감각과 사유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예술가만 그러할까?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창작자라면, 매 순간의 행위들을 만들어내며, 또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무엇이라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짐으로써 자신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는 것.
프랑수아 줄리앙은,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에서, 정체성이란 정해지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형성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정해진 문화라는 것도 없다. 문화란, 개인과 각 집단이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자원이다. 문화 또한 개인의 정체성처럼, 고정된 본질이 아니며 계속해서 움직이는 과정이다. 거기에서 ‘공통을 통한 연결’이 온다. 대화에서 공통의 기반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여러 문화권을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그 기반을 많이 발견한다. 차이를 그저 존중하기만 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도 여러 문화가 혼재된 상태. 경계인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유동성이 아름답다.
또 미완과 미정에 대해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밑바탕만 색칠되었을 때나, 또는 반 정도만 색칠되었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후의 완성에 대한 다양한 잠재성 때문일까?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수많은 상상. 무언가가 되지 않아서, 완성되지 않아서, 정해지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 삶은 끝날 때까지 그런 것 아닌가. 죽을 때까지 무엇으로 완성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편, 늘 무언가가 이미 되어 있는 것임에도 분명하다. 그러면 완성의 효용은 무엇일까? 완성이라는 의식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고.
최근엔 사람들과 ‘공간’에 대한 대화를 했다. 공간의 범위는 그저 자기의 방이나 거주지부터, 자신이 만드는 또 다른 공간, 자주 가게 되는 공간들. 크게는 거주지가 있는 지역적 특성, 국가. 작게는 내면의 공간까지- 너무 다양하다. 공간을 여러 개 만든 어떤 디자이너 분은, 공간에 대한 자기 철학이 확실하다. 공간은 자기의 역사를 최대한 담아 자신을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만드신 공간의 하나하나의 자재, 소품에서 취향이 묻어져 나오는 예술가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저는 공간이 저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지금 살게 된 곳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최소한의 필요한, 또 편안한 물건만 구비한 채, 결국 그 모든 것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언제든 장소를 옮길 수 있는 상태로 지낸다고 했다. 그분은 ‘그게 지은 씨인 것이죠.’라고 말한다. 반박할 수 없었다. 여전히 존재하거나 사라진 여러 공간들. 기억에 남아 여전히 사랑하는. 물질적으로 실재한다는 것보다 있었다는 것만으로, 기억으로 사랑을 지속하는. 이전에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이. 아마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일지 모른다. 이후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한 곳에 얽매이거나, 한 가지 리듬만 고수하거나, 한 가지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에만 예속되길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단 하나의 존재 방식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삶을 실험하는 사치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물에 걸린 것과도 같은 실존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다. 한 발짝 물러나 대열의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것, 대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더 이상 구속되고 속박된 채 정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족쇄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사유와 운동의 절대적 자유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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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로맹 베르트랑이 매우 분명하게 주장했던 바이다. “안에” 존재하기보다는 “사이에” 존재하기, 안주하지 않고 항상 자리를 바꾸기. 나아가 이런 본성적 “불안”은 어쩌면 인문학의 소명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질문한 역사가의 자리에 관해서 대답해 보자면, 역사가에는 고정된 자리가 없다는 것이 규칙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있다고 확신해서 그것을 쟁취하고 지켜 내기 위해 평생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르셀 데티엔이 말했듯 “뿌리내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저는 인문학에 속한 직업 중 상당수가 사회적 게임의 명백함이나 주어진 정체성에 대한 기대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고 나름 확신합니다. 이는 그 자체로 타인의 말에 기꺼운 환대의 문을 열어 줍니다. 이때 게임의 조건과 규칙은 간단합니다. 결코 제자리에 있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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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지만 끈질기게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멜로디를 되찾고, 갈림길보다는 교차점이 더 많은 다양한 삶의 선들을 다시 연결해 보자. 언제나 우리였던 것을 지금 이 순간의 우리와 화해시켜 보자.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이 지닌 복잡성 속에서 다시 태어나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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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라 흘러들어 오게 된 이 자리에 너무 큰 중요성을 부여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처럼 어떤 무질서 속에서 내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확고한 의지나 목적, 우주적 질서의 결과라기보다는 다양한 실존의 혼란이 초래한 결과다. 나는 어쩌다 보니 여기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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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소가 내 소유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통해 존재의 잠재력을 발휘해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따라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무언가 말해 주는 장소는 나를 이곳으로까지 이끈 가시적이거나 은밀한 지리적·사회적·감정적 여정을 담는 곳, 정체성 형성 과정의 흔적을 보존하는 자리일 것이다.
클레르 마랭 <제자리에 있다는 것>중에서
이제, 안정감이 들었거나, 혼란스럽고, 정해지지 않았다가, 확신이 들었거나, 혹은 불확실성 속에 불안했던 그 모두의 것에 우열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든 것이 삶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