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나 전자기기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쓴다. 절대 완벽히 표현할 수 없다고 놓아버렸다가도, 습관처럼 다시 잡는다. 쓰기는 원치 않아도 늘 충동적으로 일어난다. 이해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두루뭉술한 느낌을 이해하려 열심히 써 내려가고 나면, 늘 무언가를 미리 정의내려버린 것을 깨닫는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어떤 기억과 경험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 일면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ㅡ 그렇게, 쓸 때 이해되는 것 같았던 희열감 대신,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자유가 옅어지는 답답함이 더 크게 느껴져 버리는 것이다. 이 순간 현재의 삶이 언제나 글보다 정확하고 풍부하다. 어떤 글이건 사실에 가까우면서도 픽션이다. 결국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쓰다 보면 무언가를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으면서도 곧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리곤 한다.
타인에 대해 쓰는 일은, 자신에 대해 쓰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교사일 때 아이들의 관찰 평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을 규정짓는 것은 스스로 해체하면 될 일이지만, 타인에 대한 이야기는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늘 미안하게 느껴진다. 스스로를 이해해 보려 쓰다가 주관적 시선으로 해석한 가족에 대한 글들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고, 그의 일면만을 나의 지극히 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일관적이기만 한 서사는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폭력적이다. 다른 다양한 해석을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고요한 변화>와 같이, 일과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기보다, 산발적인 것에 가깝다. 의미를 붙여주는 언어는 삶에 매우 도움이 되면서도, 또 어떤 측면에서는 생각을 가두는 틀이 되어 괴롭게 한다. 그럼에도 왜 계속해서 쓰게 될까? 쓰는 행위는 무엇을 전해주는 것일까?
나는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또 거의 손댈 수 없고, 변함없고, 뿌리 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기준이자 출발점이자 원천이 될 수 있는 장소들: 나의 고향, 내 가족의 요람, 내가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집, 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나무, 온전한 추억들로 채워져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다락방......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나의 공간들은 부서지기 쉽다. 시간이 그것들을 마모시킬 것이며 그것들을 파괴할 것이다. 어떤 것도 그전에 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고, 내 기억들은 나를 배반할 것이며, 망각이 내 기억 속에 침투할 것이고, 나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가장자리가 다 해지고 색이 바랜 사진들을 지켜볼 것이다. .. 공간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라진다. 시간은 공간을 데려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내게 남겨놓는다.
글쓰기: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기.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어딘가에 하나의 홈,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시, 또는 몇 개의 기호들을 남기기.
ㅡ<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남은 과거의 공간처럼, 사람이나 풍경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무엇인가에 대한 생생하고 정확해 보이는 기억은 시간에 따라 바래고 변형될 것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의 무언가는 포착할 수 있다. 변하더라도 지금 붙잡아둔 흔적은 당시 지녔던 의미와 생각의 조각을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사건이 발생하듯, 글도 그저 그 순간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삶의 이야기에 대해 보다 진실하거나 자유로우려면, 일관성만에 의지하기보다 현재의 느낌과 감정에 충실한 것이 낫겠다.
때때로, 일관성을 띠려 노력하게 될 때도 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울타리나 틀 역할을 해주어야 할 때. 하미나 작가가 썼듯, 일관성은 인내와 고통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ㅡ일적 대상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지도 못한다. 결국 제한된 면만을 보여주게 되어 자유롭지 못함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엔, 안정감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괜찮다. 또, 그 안에서도 조금씩 흘러나오는 다른 면의 모습이, 관계를 보다 유하고 진실하게 만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삶의 동반자들에게는 자유로이 비일관적일 수 있다. 보이길 원하지 않아도 발견할 수밖에 없는 모습일 것이다. 이후에는 서로의 그 수많은 모습을 통합해 인식해 가며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할 전체를 사랑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그 비일관성이야말로, 나와 타인의 가장 매력적이고 진실한 부분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변화하며 발견하게 될 미지의 모습들, 복잡하고도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그 모습들이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