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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두 Jan 30. 2023

힘내라는 말대신

현장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모욕적인 표현을 수집하던 중 두 가지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인 다 되었네요."

"희망을 가지세요."

전자는 이주민을 향한, 후자는 장애인을 향한 모욕적인 표현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되었다. 당혹스러웠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얼핏 칭찬이나 격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칭찬과 격려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말을 한 당사자에게 이런 표현이 듣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일 수도 있다고 알려준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라고 항변한다면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걸까? 모욕을 한 사람은 없고 모욕을 당한 사람만 있으니, 모욕을 당한 쪽에서 감내하거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딱히 상대를 차별하거나 낮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말은 명백한 실례가 되기도 한다. 비슷한 의미로 나는 ‘힘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분히 형식적이고 무신경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정하듯이 '힘내'라는 말을 툭 던진다. 물론 내가 정말 어려울 때 진심과 걱정을 가득 담아 힘을 내라고 얘기하는 사람에게는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고마움과 힘을 내는 것은 별개다. 어디선가 ‘힘내라는 말보다는 고기와 술’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푸핫,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과연 그렇겠네, 하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말은 굳이 남에게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힘을 내라며 목청을 높인 적이 있다. 


2002년 여름, 은행에 다니던 나는 직장 내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했다. 출산 후 몸이 약해진 것 같기도 했고 『나는 달린다』 (요쉬카 피셔 저; 선주성 옮김, 궁리 2007)라는 책을 읽고 ‘달리기나 해 볼까?’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남산 모임에 따라갔던 날, 나는 10km를 달렸다. 일주일간 근육통에 시달렸지만 3개월이 지난 어느 일요일에는 파주에서 열린 하프 마라톤대회에 참가해서 완주했고 10월 초, 한강에서 열린 하프마라톤대회에서는 여자 30대 2위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11월에 중앙일보에서 주최한 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를 완주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은행에서는 중앙마라톤대회를 완주한 사람 중 15명 정도를 선발하여 호놀룰루마라톤대회에 보내줬는데 나도 명단에 포함되었다. 마라톤에 입문한 지 몇 개월 만에 풀코스를 두 차례나 완주하고 나니 동호회에서 총무를 맡으라고 했다. 대회 소식이 있으면 행내 게시판에 홍보하고 인원을 모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회에 자주 출전했다. 주로에서는 손을 들어 “파이팅!”, “힘!” 하며 주자들을 응원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관계없었다. 사실 누군가 “힘!”하고 목청껏 응원을 보내준다고 해도 웃으며 화답하려면 힘이 남아있어야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해서 죽을 맛일 때는 응원이고 뭐고 귀찮은 법이다. 


경주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갔을 때였다. 하프코스를 뛰고 나서 주최 측에서 준 완주메달과 간식을 받아서 풀코스 주자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우리 은행 동호회원들을 기다리며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큰 소리로 응원을 보냈다. 

“1911번, 힘!” 

풀코스 피니쉬가 1km쯤 남은 지점이라 주자들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나보다 더 큰소리로 “힘!”하고 화답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한 남자분이 달리기를 멈추더니 걸어서 나한테 다가왔다. ‘어, 내가 뭐 잘못했나?’하고 당황했는데 내 앞까지 온 남자가 말했다. 

“아줌마, 그 빵 좀 주쇼. 배고파 죽겄네.”

그 빵이라는 건 주최 측에서 준 간식봉지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3분의 1쯤 뜯어먹은 크림빵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소를 터트리며 빵을 건넸다.

동호회원들이 무사히 완주하고 식사를 하러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한 회원이 말했다.

“아니, 누가 감히 우리 자두 씨한테 아줌마라고 해?”

우스운 에피소드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래, 백 번 힘내라고 하는 것보다는 당장 허기를 달래고 당을 충전할 수 있는 빵이 더 절실했겠지.’하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졸업생이 찾아왔다. 바로 옆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평소에도 자주 오는 학생인데 그날은 우리 학교가 이미 겨울방학을 한 뒤였다. 나는 미뤄둔 일을 처리하러 학교에 갔다. 방학이니 학생이 올 일도 없고 춥기도 해서 철문을 닫아놓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어쩐 일이야? 우리 방학인데? 난 일이 있어서 잠깐 나온 거야.”

“아, 정말요? 방학인 줄 모르고 무작정 왔어요. 저 사실은 선생님께 인생 상담을 좀 받고 싶어서요.”

내 일을 돕겠다는 걸 사양하고는 서가 옆에 의자를 끌어다 학생을 앉혔다. 천천히 서가를 정리하며 얘기를 들었다. 학생은 최근에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가끔은 손을 멈추고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어?”

“그때 기분이 어땠어?”

“응, 그럼 너는 걔한테 그 얘길 했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내가 말했다.

“힘들지?”

“네.”

“이 시간 이후에 스케줄 있어?”

“아뇨. 저, 아무것도 할 일 없어요.”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까?”

“선생님, 사랑합니다.”


우리는 학교 앞 즉석떡볶이 가게로 가서 사이좋게 메뉴를 골랐다.

“난 계란을 추가할 거야. 너는?”

“저도요.”

“라면이 좋아? 쫄면이 좋아?”

“전 둘 다 좋아요.”

“그럼 라면사리 하나, 쫄면사리 하나.”

“근데 선생님, 저는요. 떡볶이를 먹을 때, 꼭 밥을 볶아 먹어야 해요.”

“그럼 볶음밥은 두 개?”

“네!”

수다를 떨며 떡볶이를 먹고 밥도 볶았다. 내가 냄비를 잡아주고 학생이 쇠주걱으로 누룽지를 야무지게 긁었다.

“전 이거 먹을게요. 선생님, 그거 드세요.”

떡볶이 가게를 나설 때쯤에는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둑어둑했지만 학생의 얼굴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진심을 다해 들어주기만 해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선생님, 마라탕 드세요? 제가 마라탕 맛있게 하는 곳 아는데."

"빙수 좋아하세요?"다음엔 제가 빙수 사드릴게요.”

마라탕도 먹고 빙수도 먹자고 대답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나를 학생이 불렀다.

“선생님, 잘 먹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머리 위로 손하트를 만들며 짓는 미소가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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