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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두 Dec 11. 2023

무엇보다 우리집에는 커다란 솥이 있었다

엄마가 생각나는 음식

점심으로 들깨 버섯탕을 먹었다. 들깨가 들어간 걸 모를 만큼 희멀건했지만 한 숟갈 떠서 맛을 보니 입안에 들깨의 구수함과 향긋함이 퍼진다. 들깨를 갈아 넣은 국물을 먹을 때면 엄마의 토란 들깨탕이 떠오른다. 아빠를 비롯한 우리 가족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던 토란 들깨탕은 거의 유일하게 엄마 자신을 위한 요리라고 할 수 있었다. 엄마는 가리는 음식이 많았다. 입이 짧은 엄마에게 토란 들깨탕은 나름의 보양식이었던가 보다. 나는 물컹하고 끈적한 토란의 식감이 싫었지만 편식한다는 잔소리를 피하려고 억지로 그릇을 비우곤 했다. 그런데 마흔이 넘고부터는 토란 들깨탕이 한 번씩 그립게 떠오른다.

 “이걸 먹으면 속이 편해져.”

하고 엄마는 말했었다. 엄마는 들깨 수제비, 들깨 칼국수도 좋아했다. 우리 동네에는 ‘황고집 칼국수’라는 칼국수 집이 있었다. 외진 골목 안에 자리했지만, 알음알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는 맛집이었다. 칼국수, 수제비뿐만 아니라 겉절이, 열무김치도 수준급이었다. 엄마는 우리집에 다니러 오면 꼭 황고집 칼국수에 가자고 했다. 들깨 수제비가 나오면 엄마는 열무김치를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을 먼저 맛보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없이 그릇을 비웠다. 엄마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의 요리로 떠오르는 또 다른 음식은 팥칼국수다. 뭉건하게 푹 삶아 껍질을 벗겨낸 팥을 진하게 끓인 국물에, 한참을 주무르고 치대어 찰기가 생긴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납작하고 넓게 밀어서 돌돌 말아 뚝뚝 썰어 넣은 팥칼국수.

  팥칼국수를 끓이는 날은 축제 같았다. 커다란 솥에서 진한 팥 국물이 용암처럼 끓으면 신이 나서 상을 펴고 수저를 놓았다. 뒷정리를 하고 이웃에 팥칼국수를 배달하는 일은 맏이인 내 몫이었지만 엄마의 눈을 피해 설탕을 듬뿍 넣어 먹던 팥칼국수는 언제 먹어도 맛있었다.  

   

  엄마는 요리를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재료의 선택이나 손질, 양념의 배합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신중했기 때문에 엄마의 요리는 늘 비슷한 맛이 났다. 엄청나게 맛이 있다기보다는 깔끔하고 거북하지 않았다고 할까? 엄마가 하는 요리는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다. 싱크대에 놓은 재료를 보면 저녁 메뉴를 정확히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번은 집에 냉면 한 봉지를 사들고 갔다. 매콤새콤한 비빔냉면을 부탁했지만, 엄마는 멸치육수를 내서 잔치국수 비슷한 걸 만들어 내놓았다. 냉면이 아니라 온면인 셈이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고 언제나 비슷한 방식으로 요리를 해서인지 크게 실패하는 일도 없었는데 그것은 김치를 담글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김치를 담그면 내가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엄마가 말하는 대로 “이만큼?”하고 확인하며 새우젓, 마늘, 액젓, 깨, 설탕 등을 조심조심 덜어 넣었다. 마침내 김치가 완성되면 엄마가 갓 담근 김치를 쭉 찢어 통깨를 듬뿍 뿌려서 입에 넣어주었고 나는 매워서 눈물이 맺히면서도 후후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과제로 김장을 돕고 그 과정을 보고서로 제출해야 했다. 우리집은 며칠 전에 김장을 마친 상태였으므로 나는 콩나물인지 멸치인지를 다듬고 있던 엄마 옆에 접이식 책상을 펴고 앉아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김장하는 과정을 적어 내려갔다.  

  “배추를 다듬어? 어떻게? 아, 씻기 전에 대가리를……잘라? 응, 그리고 소금을 뿌려? 어, 절여지면 씻는다고? 절여진, 배추를, 씻는다, 그리고……물기를 빼?”

 김장김치가 완성되는 과정을 종합장 한 면에 빼곡이 적어넣고는 만족스럽게 덮으려는데 엄마가, ‘무엇보다 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를 꼭 적으라고 주문했다. 그 말이 어쩐지 유치하게 느껴져서 그건 안 적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엄마가 버럭 화를 내며 “시키는 대로 해!”했기 때문에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싫은 문장을 적어넣었다. 연필로 적었으니 제출하기 전에 지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대로 제출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얼마 전에 삼청동에서 유명한 수제비 집에 들렀다가 국물의 신세계를 맛보았다. 얇으면서도 보들보들한 수제비 반죽도 훌륭했지만, 국물이 정말 최고였다. 깊은 감칠맛이 나는데 무겁지가 않고 아주 깔끔했다. 며칠 뒤, 집에서 수제비를 만들기로 하고 육수를 끓였다. 보통은 멸치를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이는 게 전부였겠지만 이날은 특별히 냉동실에 아껴둔 건새우와 다시마, 대파를 더 넣어 끓였다. 맛있는 국물을 만들고 싶어서 조금 신경을 썼더니 국물이 두 배로 맛있어졌다. 정성을 들인다는 건 이런 거겠지. 조금 더 신경 써서 살피는 것. 요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인지 몸살감기가 찾아왔다. 잘 먹고 잘 자야 빨리 낫는다고 한다. 하필이면 이제는 다시 맛볼 수 없는 엄마의 토란 들깨탕이 떠오른다. 꿈에서라도 엄마가 토란 들깨탕을 끓여 준다면 나는 후루루룩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이렇게 말할 거다.

  “엄마, 더 없어? 너무 맛있어서 다 나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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