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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은희 Sep 01. 2023

산티아고일기(2023/01/15) : 순례 15일차

밀밭 가운데서 길을 잃어도 좋아! (리온to사아군 40km + 레

1. 경관에 압도당하다


아침 출발 때 확인하니 비예보가 있다. 오늘은 다행히 오전 6~8시 사이만 잠깐 내리는 비인데, 문제는 내일(16일 월). 비의 양도 상당하거니와 하루 종일, 다음날 오전까지 내린단다. 

까리온에서 레온까지 거리는 94.5km. 대체로 3일로 끊어 하루 30km 내외를 걸어야한다. 비 맞고 걷는데 한계가 있으니 모든 순례객이 오늘 최대한 걷자고 각오가 대단하다. 같은 방의 순례객들이 다들 새벽 6시부터 분주히 움직인다. 최소 모리타노스까지 29.9km, 최대 사아군까지 39.4km를 걷는다고 말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비오는 이른 아침. 각자의 휴대폰이나 헤드 랜턴에 의지해 우비로 무장한 채 하나둘씩 길을 떠난다. 나도 오늘은 7시 출발. 최소 모리타노스까지 가보고 더 갈 수 있으면 좀 더 가보자생각한다. 다행이다. 비는 예보대로 8시 되니 잦아든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오는데, 구름은 우리가 걸어가는 서쪽부터 걷어진다. 해는 떠올랐을 시간인데 동쪽 하늘의 구름은 여전히 두꺼워 아직 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바람이 제법 불어 구름이 물러서는 속도도 빠르다. 

마침내 10시 경부터 옅어진 구름 사이로 햇볕이 길게 내리쬐기 시작한다. 3일만에 길동무 그림자도 짠 나타난다. 오동통한 내 몸매의 반영이지만 아침 해가 기울어져서인지 늘씬한 그림자가 나타나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까리온에서 사아군(Sahagún) 걷는 내내 #지평선의_끝판왕 을 봤다. 그런데 이 광활한 대지는 저지대 평야가 아니라 해발고도 880~910m사이에 있는 고원지대다. 저멀리 풍력발전기가 서 있는 곳들이 고원의 가장자리들이고, 대체로 구름이 가까이 있고 멀리보면 지평선에 구름이 걸쳐 있는 경우도 있다. 


자연에 가까워지니 날씨가 기분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지난 이틀 무거운 하늘에 순례객들도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듯 했는데, 날 좋고 풍경 황홀하니 다들 걸으며 사진 찍기 바쁘다. 푸른 하늘의 비중이 늘어날수록, 예술적 형상의 구름이 펼쳐질수록 내 기분도 덩달아 밝아진다. 


사방은 아득한 지평선인데, 지평선은 눈높이를 넘지 않으니 눈에 들어올 하늘의 규모도 압도적이다. 마치 #반구_안에_내가_들어앉아_있는_기분 이 들 정도다. 


경관 사진을 찍어 가족카톡방에 공유한다.


[남편] 오~ 날이 엄청 좋고, 아주 넓은 평야지대늘 지나나 보다. 서울은 춥고 주말마다 눈비가 와서 나는 산행을 못하네. 

[나] 대지가 평평한 것은 맞는데, 여기 지금 고도가 880m가 넘어.

[남편] 그럼 평창같은 곳인가?

[나] 남편! 여긴 스케일이 달라. 이 고원 면적이 한반도만 하답니다. ㅎㅎ


[참고]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약 180km는 전에도 말했던 메세타(Meseta) 고원 구간이다. 스페인 중북부에 걸쳐 있는 메세타는 면적은 21만km2(한반도 면적이 22만km2임)에 해발고도는 660~1000m 사이다.(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도 메세타 위에 자리한 대도시임) 그 중 산타이고 순례길 프렌치 로드에 해당하는 부르고스에서 레온 구간은 메세타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고도는 800~1000m 사이다.



2. 이것은 순전한 똘끼, 걷다 죽어도 좋겠어!


그러니까 내가 오늘 40km를 넘게 걸어낸 것은 

절대적으로 날씨 탓(?덕!)이다. 

메세타의 경관과 규모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내 발바닥이 버텨주는 한 이 압도적 경관이 내내 이어질 수 있다면 나는 걷다 죽어도 좋다 말할 지경이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 밀밭 사이를 오래 걸을 기회가 많았는데, 초록융단처럼 넓게 깔린 밀밭에 뛰어들어 누워있고 싶은 맘이었다. 너무 좋아 혼자 허허실실 웃으며 '이건 정말 비현실적인 경관이잖아. 이 밀밭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 좋겠어!!'를 몇 번을 외쳤는지 모는다. 


그래도 심했지. 40km라니!!! (^^);;;;;


아침 일찍 출발한 덕에 30km 남짓 모리타노스에 도착한 시간이 2시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앞으로도 아득하게 펼쳐진 지평선을 보니  발걸음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내일은 하루 종일 비, 그 다음 날도 오전에 비. 오늘의 하늘을 보면 비예보를 믿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여기는 날씨 변덕 심한 고원지대, 그리고 원래 눈비 자주 내리는 겨울철의 까미노. 그래서 결국 사아군까지 40km를 걸어버렸다는. 


어제의 포스팅의 댓글에 김모 대표님이 '호승심'을 벌써 놓아버리려하냐고 적으셨는데, 오늘의 이 무모한 40km 보행은 거창하게 나를 이겨보겠다거나 뭘 증명하려는 것이기보다 순수한 똘끼에 가까운 감정이다. 


3. 사아군 이후, 순례객에서 정줄 놓고 충동적 여행자 되기


더 걷는 건 무리고, 서둘러 사아군에 문 연 알베르게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런데 가다보니 알베르게 가는 길에 사아군 기차역이 보인다. 규모가 제법 크다. 급검색 해보니 앗! 레온행 기차가 5시 40분, 7시 30분에 두 대나 있네. 

하루 종일 비 온다는 내일을 어찌할까. 아침기온은 영하 1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비 대신 눈을 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전날 그리 오래 걷기도했고, 빗속을 하루 종일 걷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면 사아군에 하루 머물러야 하는데, 

그러느니... 레온으로 다시 한 번 점핑을 했다. 기차 가격은 6.3 유로. 소요시간은 40분 남짓. 과감하게 질렀다.


기차 시간이 남아 역사에 앉아있으니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발이 '나 살려내라' 잔뜩 성이 나서 항의하기 시작한다. 발가락 잘 관리하세요~ 발바닥 안 아프세요? 댓글로 페친들이 물어봤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구석자리 벤치 하나 차지하고 신발 벗고 본격적으로 발 맛사지. "모진 주인년 만나. 발아 니가 고생이 많다. 앞뒤 안가리고 미친년 마냥 혹사시켜서 미안~" 


레온역 도착 후 더이상 걷는 건 무리. 기차 안에서 석양을 즐기면서 레온역 앞 근처 호텔방을 잡는다. 생각 끝에 이틀 방을 결제했다. 욕조에 물 가득 담아 족욕 오래하고 내일은 늦잠자며 눈이나 비 내릴 레온시를 탐방할 계획.


예정에 없이 순례객에서 충동적 여행자로의 널뛰기 여정은, 

기가 막히게 날 좋은 날 메세타의 압도적 경관 + 나의 똘끼 때문이라 말하고 싶은데,

팔로잉하는 <박노해의 걷는 독서> 페이지의 오늘자 포스팅이 발바닥이야기다. 내 발이 간 방향과 거리에서 내 사랑과 내 마음과 내 머리도 잘 따라온 건지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잠자리에 들려함. 신난다. 내일은 늦잠 자야지~^^


=======

사랑은 발바닥이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지만

내 두 발이 그리로 갈 때

머리도 마음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옳다. 버텨줘서, 알아서 움직여줘서 감사할 따름.


빗속에서 출발. 관상수 하나가 토끼 모양. (동양력에서 올해 토끼해인 걸 이들도 아는 걸까? 설마. 우연적으로 웃자라서 저럴수도)
비바람 불던 아침 출발길
서쪽 구름부터 걷히기 시작
구름이 걷히는 속도가 빠르다
급 등장 그림자. 늘씬해서 맘에 듬. ㅋ
출발해서 17km만에 만난 첫 마을
샤먼지역 토루처럼 생긴 곡식창고
이 밀밭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도 좋아!!!
네번 째 주의 시작.
기차 출발, 레온을 향해
오늘의 석양. 이런 하늘인데 밤부터 비가 온다니. 변덕스런 고원의 날씨.


Su Jin Lim 이 큰 짐을 진 채 100여 리를 걸으셨다고요? 그것도 비와 추위 속에서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 겨울 순례객의 숙명. 7kg의 무게를 매일 감당해보려 체력관리를 좀 했더랬습니다. 그래도 어제는 한 시간 정도만 비를 맞아서 우비 벗고 햇볓에 가방과 옷 말리는 중이었어요~

Jongmi Kim 한 권의 책 제목 같아요. “이 밀밭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아!” ~^^

  => 책은 이미 많고 겨우 한 번 경험으로 쓰기엔. ㅎ 또 오게 될 거 같애요. 좋은 분들 모시고 괜찮은 안내자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

Jongmi Kim 기차역 하나도 이렇게 운치있다니요. 타일인지 돌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농촌마을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르구나 싶어요.

   ==> 지금은 화물트럭이 주종이 되었지만 과거 기차나 운하로 수확 후 밀 운반하던 중요한 결절지였던 거 같아요. 역사가 깔끙하니 예뻐서 저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코로나 여파도 겹치고 요새는 기차용도가 덜 해서인가 역 주변 상권은 거의 죽었지만...

박민정 기차역이 넘 이쁘네요~! 그곳에서 즐거운 구정연휴 보내세요.

Su Jin Lim  당장 살아갈 짐을 등에 진 채 하루에 100리를 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얼마나 큰 힘을 얻을지 기대가 됩니다. 참으로 <모진년> 만난 것도 억울할 일인데, 그 <모진년>이 <미친년>처럼 살고 있으니, 아 발꼬락이 너무 불쌍하지만요. 그래도, 그 발꼬락들을 응원합니다. 잘 하셨어요. 내일 아침, 알베르게가 아닌 호텔 침대에서 눈 혹은 비가 내리는 바깥을 스을쩍 바라보고 다시 또 포근한 침대에서 잠을 이어가는 기분이 어떨지,, 아,, 정말 좋아요.

  ==> 간만에 편안한 침대에 누워 까무룩까무룩 자다깨다 하는 중. 건강 잘 챙기겠습니다. 따뜻한 말씀 감사해요~♡♡

Sukhyun Park 갱년기 초반에 저도 족저근막염이 생겨서 나름 고통스런 발바닥 생활을 했던 적이 있어요. 발바닥 너무 소중해요. 별로 아프지 않고 지나가시길~~

  => 그게 한 번은 다 겪고 지나가는 건가 봅니다. 아직은 아닌데 더이상 혹사시키지 않게 잘 달래볼께요^^

양미강 와우 40키로라니...

  ==> 제가 생각해도 좀 했다싶어 하루 푹 쉬는 중~

김영희 3년전에 레온 갔었는데. 그 황량함이 인상적이었어요. 석회암지역이라 도자기공방이 많더라구요

  => 서유럽 토양은 기본이 다 석회암. 건축에 편리하고. 그리 큰 도시 아닌데 김박은 여까지 어찌 다 와 봤을까? 좀 있다 산책 나갈건데 여긴 성당 고건축 보다 강변 산책로가 더 땡기네요~

  ==> 거기 엘카프리쵸 라고 유명한 스테이크집이 있음.넷플릭스 스테이크 레볼루션 편에 나온 호세 쉐프님 만나러요~^^

  ==> 아우~ 재밌게 사는 사람. 앞으로 재밌는 일 같이 하며 삽시다! ㅎ

이세훈 소싯적 도보여행을 몇번 해본 사람으로, 하루 40킬로는 대장정입니다. 넘 무리하시지 마세요^^ 하루 20킬로 정도, 길어도 30킬로 추천드립니다. 하루에 빼야하는 몸무게 아닙니다ㅎㅎㅎ

  ==> 네~ 어제는 진짜 똘끼. ㅋ 다시 보기 힘든 절경이 자꾸 펼쳐져서. 침대에 누워 꼬물거리며 앞으로 여정 다시 점검 중인데, 24~31km씩 안배 중이예요. ^^

Jinyoung Kwak 마치고 나서 포스팅 그대로 모으면 수필집 한 권! 제목 '모진 년, 미친년 그러나 아름다운 년?'

김태완 한반도 넓이만한 고원지대라니. 세상은 넓네요 ㅎ

Jab Kim 우리집 기집애는 카미노를 혼자서 세가지(남북, 대각선, 북부해안)로 갔다오더니 이젠 세상 어디다 떨궈놔도 걸어나올 자신이있다 그러더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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