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하게 일어나 오늘의 첫 끼니로 뭘 먹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자주 가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얹고 고추장도 한 숟갈 넣어 맛나게 비벼먹고 시원한 냉국수 한 그릇을 먹은 후, 배가 불러 근린공원에서 30분마다 가동되는 분수를 기다리면서 놀이터에서 동네 꼬마들이 뛰어노는 모습과 근처 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처음 공원에 도착했을 때가 분수가 꺼지는 타이밍이었는데, 30분 후에 분수가 시작되는 모습과 30분 동안 가동되는 모습을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으니 최소한 한 시간은 하릴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는 소리겠다. 하릴없이, 생각 없이.
누군가 나에게 대학에 입학하고-고등학교를 졸업하고-변한 것 중 가장 좋은 점이 뭔지를 물으면 망설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거라고 말해줄 거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의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었고, 내 인생의 지금에 버려지는 시간은 없어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다 생산적인 일-예를 들면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이 생기면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있으면 안 되는데. 얼마 되지 않는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서 조차도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다시 공부를 하러 가기 전 기숙사 친구들과 방울토마토를, 청포도를, 시리얼을, 초코파이를 먹으며 깔깔거리던 30분. 기숙사에서 나온 후 통학생이던 시절, 노래를 들으며 별을 보며 걷던 어두운 하교 길에서의 20분.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았던 시간들이지만 그 속에는 항상 매캐한 죄책감이 섞여있었다.
그럴 필요 없었을 텐데. 스스로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굴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그럼 조금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고3의 내가 아닌 열아홉의 나를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돌이켜 보면 이런 시간들이 나를 지탱해 주었던 시간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때는 몰랐던 걸. 왜 그걸 모르고 바보같이 굴었냐며 예전의 나를 탓하는 것도 나에게는 억울하고 가혹한 일일 것이다. 어느 작가가 그랬었다. 현재가 과거보다 조금 더 나은 것은 지금의 내가 예전의 부족한 나를 껴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이제라도 깨달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고등학생이었던 나를, 많이 힘들었을 나를 포근히 안아줘야겠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를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일은 대부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가만히 공원에 앉아있는 시간.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의 고요한 시간.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시간들. 그 속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평화로웠고, 행복한 것 같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죄책감과 불안함을 느끼던 내가 이제는 그 속에서 평안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스스로의 변화가 놀랍다. 사실 목적이 있는, 목적을 위한 시간들을 빼면 인생에 남는 건 결국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을 위한 시간들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시간들에서 다시금 목적을 위한 시간을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하는 게 아닐까. 분명 앞으로의 내 삶에는 목적을 위한 시간들이 훨씬 길 테지만, 간간히 스며있는 시간을 위한 시간들 덕분에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하고 싶다.
2016년 7월 15일
우연히 건져 올린 8년 전의 글. 예전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감성적이었던 것 같다. 아니 지금의 내가 너무 비-감성적인 걸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위한 시간들에서 여유를 느끼던 방학을 맞은 대학생 시기를 훌쩍 넘기고 다시 죄책감의 시기가 돌아왔다. 지금도 면접 준비를 미루며 브런치 글을 끄적이는 것에 은은한 불편감을 느끼고 있다.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끊임없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 지를 상기해야만 겨우 그 모습을 흉내라도 내어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고민의 시간들을 충분히 가지고, 조급해하지 않는 내가 되고 싶다. (뒤지게 어렵지만) ← 특히 이런 부분에서 감성이 많이 쇠퇴했다는 걸 한 번 더 느낀다. 뭔가 희망차고 잔잔한 마침표를 찍기가 괜히 오글거린달까..... 괜히 툴툴거리는 말을 하고 싶달까... 대체 왜 이런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