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 Burgos, 호모 안티세서를 만나다
- 2019. 11. 21. 베를린 공기는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오늘도 5km 달리기를 하러 나갔어요. 전속력으로 뛰면 기분이 상쾌합니다. 심장 고동 소리는 제게 생명을 일깨워줍니다. 가빠진 숨소리는 발 딛고 있는 땅, ‘지금&여기’에 집중하게 해줍니다.
- 오늘부터, “순례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마을 세 군데”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 최근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은 제 인생 책에 등극했습니다. 언어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며 섬세하게 글을 써가는 그녀는 혹시 저의 소울메이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책에서 그녀는 특별히 여행지에 대해 쓰는 걸 경계해야한다고 했습니다.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서 결국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중략) 여행 안내서들은 침략이나 전염병처럼 지구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다양한 언어로 수백만 부를 찍으면서 해당 장소를 속박하고 약화시키고 그 윤곽을 지워버렸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제가 여행지와 속닥속닥 나눈 은밀한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게, 그리고 여행지 자체를 파괴하지 않게 매우 주의하며 써보려 합니다. 부족한 글솜씨로 인해 제가 사랑한 마을들을 왜곡할까 걱정입니다. ^^;
2019. 9. 24. 순례길 11일 차, 스페인 북부 도시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했습니다. 부르고스 이전에 있는 나바레떼-나헤라-산토 도밍고-그라뇬-벨로라도로 이어지는 59.63km는 해발고도 800m에 위치한 광활한 평원입니다. 스페인어로 고원高原을 ‘메세타meseta’라고 하는데, 이곳이 바로 순례길의 악명 높은 허허벌판입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풍력 발전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평원. 바람이 무서운 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허허벌판에서 강한 바람에 시달리고 즉시 감기 몸살에 걸렸습니다. 한국에서 경량패딩+바람막이를 준비해 갔지만 옷 속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습니다. 그 날 밤 감기약을 먹고, 패딩을 입은 채 침낭에 들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잤습니다. 다음 날,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아, 버스를 타고 부르고스로 넘어 가기로 했습니다. 괜히 버스를 탄다고 하니 시무룩해지더라고요. 약간 실패한 느낌이고 막. 약간 진 것 같고(누구한테?). 몸도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급하게 부르고스의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별 기대 없이 간 숙소였는데, 숙소 주인은 우리를 만나자마자 비쥬(볼뽀뽀)로 인사하고 따뜻하게 안아주었습니다. 숙소는 무척 깨끗하고 포근했습니다. 숙소에 배낭을 두고 부르고스 거리에 나오자, 메세타의 거센 바람은 온 데 간 데 없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감기약을 끊고 샹그리아를 먹었습니다. 샹그리아에 비타민 많으니까 괜찮아, 약보다 더 좋을 걸, 이렇게 스스로 플라시보 효과를 불러 일으키며.
따뜻한 환대와 달달한 샹그리아 한 잔, 감기 기운은 서서히 사라지고 부르고스에 대한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① 순례길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기에 적합한, 대도시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좋았던 도시, 부르고스
순례길은 사실 스페인 시골 마을 탐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은 기대하기 어렵죠. 부르고스는 순례자의 억눌렸던 소비욕과 물욕을 되살아나게 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이곳 부르고스에서 경량 패딩을 추가 구입했습니다. 패딩 두 개 입으니 아침의 칼바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럽 사람들이 많이 입는 누빔 형식의 경량패딩이라, 제 검정색 쫄쫄이와 조화를 이뤄 마치 로컬 유러피언이 된 것 같은 패션이었습니다(제 생각). 드디어 스페인 시골을 걸어가던 시골쥐에서 조금 도시쥐가 되었습니다.
②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르고스 대성당
부르고스 대성당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참고로 산티아고 순례길 자체도 세계문화유산입니다(http://heritage.unesco.or.kr).
화려한 부르고스 대성당.
대성당 내부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조형물이 화려합니다. 파스텔 톤 스테인드 글라스가 회랑을 따라 설치되어 있고, 예배당에서는 수 십 가지 버전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당대 장인 길드에서 만들어 설치한 갤러리, 위엄있는 목조 성가대석을 바라보며 13세기에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때도 순례자들이 이곳에 들러 몸과 마음을 쉬다 갔겠지요. 성당 곳곳에 그림 작품도 많았는데요, 순례길을 걸으며 지겹도록 보아 온 포도, 산딸기, 나무 등 자연 환경이 그대로 그려져 있어서, 이를 하나 하나 찾으며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아이처럼 ‘어 이거 포도!’ 외치며. 화려해요, 멋져요, 재밌었어요.
③ 소담한 골목길, 맛있는 타파스 바
순례길에서 네 번 정도 만나는 대도시에서는, 타파스(tapas 혹은 pinchos, 작은 접시에 나오는 간단한 음식. 주로 음료와 곁들여 먹어요) 바에 가지 않을 수 없죠. 스페인식 타파스 바에 가면, 문어 요리, 피순대 요리, 양송이 요리, 파에야 등 다양한 안주 거리도 있고, 맛있는 리오하 와인, 스페인 식 샴페인 까바, 지역 맥주, 그리고 상큼한 샹그리아도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지나온 길 이야기도 나누고,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바에서 간혹 조우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소담하고 예쁜 골목길이 광장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bar에 사람들이 엉켜 서 있어도 능숙한 스페인 바텐더는 사람들이 도착한 순서를 정확히 기억해 주문을 받습니다. 메뉴판이 없는 바가 많으니, 미리 외워 가야 합니다. “우노 비노 띤또, 뽀르 빠보르~” (레드 와인 한 잔 주세요).
스페인 와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요(=많이 먹어봤는데요)! 스페인 리오하RIOJA 와인이 마트에 보인다면 사 드세요. 프랑스 보르도 지방 사람들이 스페인으로 내려와 기술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현재 리오하는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인증받은 지방입니다. 스페인 와인이 맛있는 것은 큰 일교차+뜨거운 햇볕 덕분이고요. 제가 느꼈죠, 포도가 달콤해질 수밖에 없는 뜨거운 스페인을.
④ 부르고스 인류사 박물관 Museum of Human Revolu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사 박물관이 가장 좋았습니다. 이 곳에서, 제 머릿 속 한 켠을 차지하게 된 인간, 호모 안티세서(Homo Antecessor)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호모 안티세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넘어온 초기 인류.
그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인류 진화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호모속 모형이 나열되어 있었는데요,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초기 인류는 털이 많고,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숭이에 더 가깝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 와중에 호모 안티세서는 혼자 고고하게 매끈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초기 인류의 모습. 호모 안티세서와는 매우 다르다.
인류학은 완결된 학문이 아닌가 봅니다.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인류가 발견되면서, 1) 인류가 언제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나(통설은 100만 년 전후/ 최근 조지아 드마니시와 인도네시아에서 출토된 화석에 의하면 18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났을 가능성 있음) 2) 호미닌의 시작은 단일종인가 복수종인가 (통설은 단일종 가설/ 최근 아프리카에서 새로 발견된 화석에 의하면 복수종 가설 지지) 등 논쟁이 여전합니다.
제가 만난 호모 안티세서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80만 년에서 7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에 정착한 최초의 인류입니다. 정확히는 호미니드 속, 호모 하이델베르게네시스 종 초기 인류라고 합니다(아래 도표 참조).
짧은 지식으로 공부한 결과, 인류의 진화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ppt 발표 안해 본 법대생 티나죠)
최초로 유럽에 정착한, 해말간 그의 얼굴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나고 자랐을 텐데, 어떻게 유럽으로 올라갈 생각을 했을까요. 제가 수 차례 받았던 질문, ‘왜 여행을 가나, 왜 방랑자가 되려고 하나’ 물어보던 사람들의 질문을 되려 그에게 던져봅니다. 왜 떠나셨나요?
제 상상 속 그는 밝은 눈빛의 탐험가입니다. 어딘가에 나와 딱 맞는 곳이 있을 것 같고, 집에서 조금만 떠나도 새롭고 신기한 풀과 동물이 있는데, 매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의식을 치러야 하다니, 그는 몸이 근질근질 했겠지요. 흔히 자동차 10만 키로를 탄다고 하는데, 지구의 둘레는 46,250km니까 지구를 두 번이나 돌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거리입니다. 호모 안티세서에게 자동차가 주어졌다면, 자동차로 집-회사를 반복하는 대신, 지구 전체를 이웃집 드나들듯 신나게 달렸을 것 같습니다.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고, 자동차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호모 안티세서를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지난 달에 순례길을 걷던 호모 안티세서를 본 것만 같습니다. 시인 쉼보르스카가 얼굴을 주제로 쓴 ‘부산한 거리에서 나를 엄습한 생각’이라는 시에서 말한 것 처럼요. 일부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자연 또는 신이, 매번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낼 수 없으니 예전에 만든 얼굴을 또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데요, 시인의 상상이 재밌지 않나요. 저도 상상해 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미지의 세계를 진지하게 탐험하는 이 시대의 호모 안티세서를요. 최초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에 정착한 그를 만난 것 같은 기분,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자연은,
끊임없는 노역에 지친 나머지
해묵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재활용해서
과거에 이미 사용했던 얼굴들을 우리에게 다시 덮어씌웠을지도 모른다.
청바지를 입은 아르키메데스가 당신 옆을 지나가고,
예카테리나 여제가 싸구려 헌 옷을 입고 다니고
파라오 가운데 누군가는 서류 가방을 든 채, 안경을 끼고 있을지도 모른다/(후략).”
<요약>
맛있는 음식, 적당히 큰 도시 규모, 친절한 숙소 주인, 화려한 부르고스 대성당,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해 준 인류사 박물관, 이 모든 것이 제가 부르고스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순례길을 걸으신다면, 부르고스에도 한 번 들러보세요!
... 다음 이야기에 계속 :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좋았던 도시 두 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