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규 마임 50주년 "내가 가면 그게 길이지" 공연 (7/18) 소감
군더더기 없이 충만한 예술을 보았다.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님은 처음 무언극, 즉 말이 없는 침묵 속의 연극이라는 점에서 마임에 끌렸다고 한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사석에서도 주로 젊은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시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말보다는 그의 행동과 행보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그런 분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마임에도 말과 소리는 꼭 필요한 지점에 등장했다. 그 어떠한 연극적 시각적 장치 (불, 빛, 그림자, 의자, 한지, 꽃) 또한 마치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을 때 마시는 한 잔의 물과 같은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자극이 많은 요즘 같은 세상에 단출한 장치로 소통하고 감동을 주는 일처럼 어려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온몸의 진동이 뿜어내는 힘이 컸다. 맨몸이 수행하는 정적인 동작들이 그렇게 역동적일 수가 없었다.
아이가 등장했다. 그리고 다음 아이가 무대에 더해졌다. 팬터마임의 101이라고 할 수 있는, 벽 짚는 제스처와 줄다리기 등으로 구성된 마임을 하는 것으로 그렇게 공연이 시작되었다. 팬터마임이라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있는 듯한 환상을 주는 제스처로 이뤄진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상상하며 몸을 움직임으로써 연극적이고 해학적인 극을 만드는 것이 마임이라는 장르 자체가 갖은 가장 원초적인 매력일 것이다. 공연 초반부에 등장한 그의 초기 작품은 내가 알고 있던 팬터마임의 전형성을 갖추고 있었다.
어느덧 잘게 이어졌던 재현적인 움직임이 사라졌다. 호흡/기운과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의 의미가 함께하기 시작했다. 연희적이고 연극적이던 마임의 경계가 조금씩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내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한지>라는 작품은 마치 움직이는 조각이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서로 다른 각도와 포징 posing으로 변주되어 한지 위에 그림자로 표현된 몸이 때로 거대한 곤충 같았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겠지만, 이는 내게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벌레가 현실화된 것 같았다.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서 느끼는 초현실적인 나의 경험과 시각적 조형적 요소가 크게 와닿았다. 마치 코 고는 소리 같았던 음악도 이런 나의 경험에 일조한 것 같다.
<있다, 없다>에서 관객에서 터져 나오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아이들에게는 허공을 보며 사라진 빨간 의자를 두리번거리며 찾는 바보 같은 모습이 참 재미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마임이 연극에 있는 말을 없앴다고 볼 수 있고, 실제로는 없는 사물을 있다고 상상하면서 동작으로 극을 만들어가는 예술인지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삶의 단순한 진리를 녹여낸 것은 장르적으로도 필연적이지 않을까. 다만 주제는 무거웠다. 나와 옆에 “있는” 우리가 언제든 없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시켜주는 죽음에 관한 묵직한 동화 같았다. 함께 공연을 관람한 두 호주인 친구들인 메리 Mary와 칼럼 Callum은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요소들이 작품 면면에 드러나며 한 작품 속에 공존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내겐 너무 익숙했기에 특별하게 느끼지 못했는데, 역시 우리 전통인 해학적 아름다움이 현대 예술에까지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몸의 움직임을 읽는 것보다 소리의 움직임을 읽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쉽다 보니 때론 자연스레 음악에 더 집중하게 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팬터마임에서 등장한 피들러(바이올린)의 튠이 처연하면서도 때론 고풍스러웠다. 기타와 바이올린이 거의 모든 작품에 걸쳐 연주했는데, 마치 커다란 어항 속에 있는 듯한 소리의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보잉, 격정적인 트레몰로가 그 소리의 바탕을 만들어낸 기타의 음악에 운동성을 더했다.
마지막 작품에서는 시공이 뒤틀린 듯한 순간이 있었다. 미적 가치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날것,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 판소리 구음과 찢기고 흩뿌려진 꽃이 혼돈 속 아름다움을 만들었다. 상식의 선에서 이루어지는 합의된 조화를 초월하는 순간이었다. 제의적 경지에 이른 이 마지막 작품은 사람의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풀고 불평함을 풀어주는 샤먼이 했을 일을 펼쳐낸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느낀 감동의 여운은 머리가 아닌 몸과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 * *
반 세기에 걸쳐 세상과 씨름하면서도 본질에 집중하며, 예술을 통해 개인의 답을 찾는 동시에 사회 속에서 예술과 예술가들이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일궈나가는 것은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럴듯한 멋 부림과 흥겨움에 더 관심이 많은 진정한 예술에는 더욱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한 젊은 예술인으로서 이렇게 한 분야의 귀감이 되는 참 어른을 뵙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귀하디 귀하다. 함께 고생한 부인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 할아버지와 프로테스트도, 산책도 함께 하고 몸짓 예술을 배우며 할아버지를 친구라고 부르며 따르는 손자들만 봐도 그의 마임 인생 50년이 얼마나 아름답게 영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와 내가 있는 자리를 모두 살피는 따뜻한 마음과 행동력이 맺은 결실이지 않을까.
단단하게 집중된 삶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가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삶과 예술은 흔들림 없이 생동한다. 7월 18일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본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님의 50년을 톺아보는 공연을 본 후, 나는 그가 춘천의 살아있는 그리오(griot)인 동시에 세계의 그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가라고 감히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