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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네 Jun 25. 2021

북미관계에서 우리나라는 중재자일까 협상자일까

분쟁 상황에서 협상 말고 할 수 있는 것들

협상학에서 협상과 중재는 다른 개념이다. 역할극을 한다고 치면, 중재자와 협상자는 서로 맡은 역할이 다르다. 이번 글에서는 분쟁 해결 방법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고, 이 분류법에 따라 북미관계에서 왜 한국은 중재자가 되기 어려운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예를 들어 보자


전세 계약을 하려고 한다. 집주인과 세입자는 이사날짜를 맞추고 보증금 금액을 정한다. 도배는 주인이 해줄 건지, 반려견은 키워도 되는지 이것저것을 당사자들끼리 논의한다. 의견 충돌이 있을수도 있고, 합의를 도출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협상에 해당한다.


한편 집주인과 세입자의 의견이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다. 혹은 한쪽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세입자가 전세사기를 당했다. 이런 경우에는 부동산 중개인이나 경찰, 사법기관 등 제삼자의 개입이 필요하다. 당사자간의 협상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이때 조정, 중재, 재판 등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 우리끼리는 안 되겠어. 누가 좀 도와줘.


제3자 개입의 정도에 따라 분쟁 해결 방법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대략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차례로 협상, 촉진, 조정, 중재, 판결 정도가 되겠다. 


위의 과정은 꼭 차례차례 밟아야 할 단계는 아니다. 서로 합의가 안되면 소송으로 직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카테고리는 제3자의 개입과 권위의 정도로 본 분쟁 해결의 스펙트럼이라고 보면 되겠다.



1) Negotiation 협상

물론, 협상이라는 말은 아주 넓은 의미로도 쓰인다. 아래 언급되는 모든 과정에서 당사자들끼리 만나 교섭하는 행위를 협상한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분쟁 해결 과정의 한 방법으로서의 협상은 중재나 조정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뜻을 가진다.


일단 제3자의 개입이 없다. 당사자들(parties)끼리 논의한다. 가장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분쟁해결 방식이다. 당사자들이 직접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 결정한다. 당사자의 참여도가 매우 높다.



2) Facilitation 촉진

협상 단계에서 사회자가 살짝 끼어들어 대화를 촉진시킨다. Facilitator(촉진자)의 역할은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처럼 매끄럽게 대화가 진행되도록 돕는다. 특정 당사자가 소외되지 않도록 신경 쓴다.


3) Mediation 조정

Facilitation 단계와 일부분은 겹친다. 하지만 이때 조정자는 당사자들에 의해 승인된(authorized) 사람이다. 조정자는 적절한 선택지를 내놓기도 하고 협상 패키지를 구상하기도 한다. 조정자는 이해당사자들에게 '이런 선택지를 고려해보세요' 하고 권고(advice)한다. 촉진자보다는 조금 더 분쟁 개입의 정도가 높다. 하지만 조정자의 견해는 조언이나 권고 차원이지 법적인 강제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한국법, 미국법, 국제법인지에 따라, 그리고 디테일한 상황에 따라 강제력에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어쨌든 중재나 판결보다는 강제력이 적은 것은 맞다.) 재판까지 가는 것보다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4) Arbitration 중재

분쟁을 재판이 아닌 중재인의 판정에 의해 해결하는 방법이다. 다음 단계인 Adjudication과 다른 점은 누가 중재자가 될지 당사자간의 합의에 따라 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중재인을 각 분야의 전문가로 모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5) Adjudication 판결

소송을 하는 전체 과정은 Litigation이라고 한다. 이러한 소송 과정이나 적절한 사법 절차를 통해 내려진 판결이나 선고를 Adjudication이라고 한다. 이것은 가장 formal 한 형태의 분쟁해결 방법이다. 


단, 누가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재판장에 설지 당사자들이 선택할 수 없다. 이전까지는 분쟁 해결에 끼어들 제3자가 누가 될지 합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누가 판결자가 될지 당사자들은 결정하지 못한다. 해결 '과정'에 대한 합의 또한 할 수 없다.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하며 이에 따른 재판 결과 역시 구속력이 있다.


하지만 이 단계는 국가들 관계에서는 잘 실현되지 않는다. 국제법은 특정 국가에 대해 강제력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잠깐, 헷갈리는 용어를 정리해보자.


*갈등 상황에서 협상 말고, 그럼 Concession(양보)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양보는 어느 과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협상을 하다가도 양보할 수 있고 조정 과정에서 당사자들끼리 한 발자국 양보할 수 있다. 다만 Adjudication 단계에서는 서로 양보가 이루어지지 않아 도달하게 된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조정이나 화해라는 의미로 Conciliation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Conciliation은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나 행위를 의미하지, 분쟁해결 메커니즘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Negotiation을 통해서도 Conciliation을 달성할 수 있는 셈이다.






◆ 우리나라가 중재자라고?


종종 북미 관계를 이야기할 때, 우리나라가 중재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등의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위의 분쟁 해결 과정의 정의에 따르면, 이는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이다. 북미 관계에서 우리나라는 빼놓을 수 없는 이해당사자(Stakeholder)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휴전협정에 서명한 당사국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북미관계 혹은 북핵을 논할 때 우리나라는 중재자, 즉 협상 결과에 크게 관련이 없는 제3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할, 이해관계가 엮이고 엮인 핵심 이해당사자(Stakeholder)다. 


다시 말해, 중재자는 북한이나 미국과 전혀 상관없는 제3자여야 한다. 스웨덴 정도면 중재자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북한의 관점에서 우리나라가 공정한 제3자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중국이나 미국의 관점에서는? 누가 봐도 우리나라는 핵심적인 이해당사자일 뿐, 북한과 미국을 중재할 중재자는 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중국이 북핵 협상에서 공정한 제3자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우, Facilitator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우리 정부는 이런 의미로 중재자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나라가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표현은 협상 용어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 표현이 그대로 외신에 번역되어 보도된다면, 남한이 도대체 어떻게 중재자가 된다는 건지,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 특히 법을 공부한 미국 정치인들은 이게 무슨 소린지 의아해 할 수 있다. 중재자라는 말이 '북한과의 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미사여구 정도로 사용할만한 용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 결론


협상 ≠ 중재(조정)이다. 

한국은 미국, 중국, 북한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촉진자나 협상당사자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참고문헌>

"Adjudication," https://www.investopedia.com/terms/a/adjudication.asp.

"Conciliation,"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Relationship to Other Settlement Processes." Lecture materials from Processes of International Negotiation, 2020 Fall. 

"중재," "대한민국 중재법," "조정,"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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