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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담 Mar 24. 2024

말없는 사람들

1994년 태어난 나를 1997년도 시집에서 발견하기

말없는 사람들


                    정양


겨울 아침 해장국밥집에

말없는 사람들 서넛이

해장국밥을 기다린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들 말이 없는지

해장국밥 말고 무얼 또 기다리는지


몽땅 털린 노름꾼인가 해고된 노동잔가

도둑놈인가 정치꾼인가 수배자들인가

말없는 것이 맘에 걸린다

나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 맘에 걸린다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맘에 든다

누구인지 몰라서 맘에 든다

말없는 것이 맘에 든다


노름꾼처럼 노동자처럼 수배자처럼

나도 담배를 물고 해장국밥을 기다린다

그들과 나는 일행인가 해장국밥이 함께 나오고

해장국밥이 뜨거워서 접시에 덜어 먹는다


그들도 해장국밥을 덜어 먹는다

덜어 먹고 덜어 먹어서 해장국밥이 바닥나도록

아직도 말들이 없다


우리가 말없이 기다리는 것은

덜어 먹고 덜어 먹어도

끝끝내 식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말없이 기다리는 것은

해장국밥보다 더 뜨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보다 죽음보다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말없이 기다리는 것은

해장국밥처럼 그렇게

쉽게 나올 것 같지 않다.




시집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창비,1997) 중에서


나는 진짜 말이 없는 사람이다. 대학생 때 교수님이 숫기 없는 내가 술만 마시면 방긋방긋 웃으니까 수업시간에 발표하다가 떠니까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xxx, 너 술 마시고 안 왔냐?"


친구들이랑 삼삼오오 모여서 친구들이 한 차례씩 다 떠들 때까지 나 혼자 입에 거미줄 치고 있으니까 친구들이 기자처럼 한 마디 하라고 달려들었다. 그 버릇 개 못 줘서 회사 가서도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정양 시인의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라는 시집을 마우스 받침대로 쓰다가 목차를 떠둘러보다가 제일 마음에 가는 책 제목을 골랐다.


맨 처음에는 실망했다. 해장국밥이라니. 너무 아저씨 같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시를 배울 때에는 동어반복은 피하라고 했는데 저 시는 떡하니 같은 말을 10번이나 썼다. 그래서 실망했는데 이것을 보고 타이핑으로 옮기는 과정 중에 나는 감동 먹었다. 이른 겨울 아침에 삼삼오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똑같이 뜨거운 해장국밥을 먹기 위해 한 장소에 모였다. 화자는 저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음에 안도하고 만족한다. 그리고 같은 공간 속에서 노름꾼도 해고된 노동자도 수배자도 시인도 모두 똑같은 음식인 '해장국밥'이 나오길 기다리고, '해장국밥'은 보란 듯이 모두에게 동시에 나오며 공평하게 혀를 데일 정도로 뜨겁다. 사회 속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파전처럼 해진 그들을 '해장국밥'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하나로 단단히 데우는 것이었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나에게 해장국밥은 그냥 해장국밥이 아니라 하나의 태양처럼 느껴지게 했다.


네이버 카페에서 나는 어떤 유명한 가수가 죽었다는 내용의 글을 봤다. 그 여가수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누가 리메이크를 해도 그 가수만큼 따라올 자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수의 죽음으로 네이버 카페 회원은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 자신의 지인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연락한다며 구구절절 자신의 감상을 적었다. 나는 그 가수가 실존인물이며 내가 들어본 <방실이>란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저 글은 되게 교훈적이며 감상적이며 단순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단순하게 방실이란 이름과 그녀의 부고기사를 보고 난 후에 다시 그 글을 읽어보니까 마치 소고기 다시다를 넣기 전과 후처럼 글의 맛이 달라진 것이다. 글은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바뀐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1942년 태어난 정양 시인이 6.25 전쟁도 간접 경험하고, 5.16 군사 쿠데타도 겪고, 1997년 외환위기까지 겪은 그와 나는 다르다. 요즘 시대의 내가 가는 해장국밥 집에는 아마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새벽까지 부장님과 음주를 한 신입사원 남자, 야간 택시 운전을 마치고 허기진 속을 달래는 택시 운전사, 밤낮이 바뀐 취업 준비생 혹은 새벽 시장을 준비하는 근처 시장 상인들. 만약 내 감성으로 해석하려면 저 해장국밥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 이름은 김양이 딱이겠다.



겨울 아침 해장국밥집에

말없는 사람들 서넛이

해장국밥을 기다린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들 말이 없는지

해장국밥 말고 무얼 또 기다리는지


시작이 너무 설렌다.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서문이다. 차갑고 시린 겨울 아침과 뜨거운 해장국밥집은 대조된다. 그런 대조적인 시공간 속에 '말없는 사람들'이 하나도 둘도 아닌 서넛 뭉쳐서 서있다. 화자 그들이 누구인지, 왜 말이 없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말없이 해장국밥 말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화자인 시인 역시 그들처럼 기다리는 게 간절하게 바라는 게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유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이지 써놓고 보니까 저 시 구절에 내 마음이 더 설렌다.



몽땅 털린 노름꾼인가 해고된 노동잔가

도둑놈인가 정치꾼인가 수배자들인가

말없는 것이 맘에 걸린다

나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 맘에 걸린다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맘에 든다

누구인지 몰라서 맘에 든다

말없는 것이 맘에 든다


화자는 그들의 정체를 모르지만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자신 나름대로 퍼즐을 맞추고 있다. 돈이 없어 한탕해 보려고 도박판에 들어간 노름꾼, 아니면 회사에서 부조리하게 해고된 연약한 노동자, 혹은 한 것도 없이 남의 것을 훔쳐 사는 도둑놈, 그것도 아니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정치꾼, 그것도 아니면 정치판에 의해 수배된 사람들. 여기서 화자는 세상 사람들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침묵하니까 오히려 공포로 다가온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탐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되게 이중적인 감정이다. 말이 없어서 불편하지만 말이 없어서 편한 화자. 그들이 궁금하고 관심은 가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까발리고 싶지 않은 점은 나와 무지하게 닮아있다.


카페에서 막내와 셋째가 내 앞에서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행여 그들의 대화를 누가 들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아줌마 둘이서 자식을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토론하는 내용을 은연중 엿듣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어떤 말을 엿듯게 되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하지만 이 또한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화장실 변기에 배출될 기억들이다.



그들도 해장국밥을 덜어 먹는다

덜어 먹고 덜어 먹어서 해장국밥이 바닥나도록

아직도 말들이 없다


우리가 말없이 기다리는 것은

덜어 먹고 덜어 먹어도

끝끝내 식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말없이 기다리는 것은

해장국밥보다 더 뜨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보다 죽음보다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구절을 다 읽고 나서 궁금해졌다. 그들이 말이 없던 이유는 뜨거운 국밥을 먹느라 입을 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말없이 식사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기에 침묵으로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화자가 표현한 '사랑보다 죽음보다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이며 '덜어 먹고 덜어 먹어도 끝끝내 식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끝끝내 식지 않는 것'을 보고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ost '변하지 않는 것'이 떠올랐다.


"すれ違う人の中で 君を追いかけた

変わらないもの 探していた

あの日の君を忘れはしない

時を越えてく思いがある

僕は今すぐ君に会いた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속에서 너를 뒤쫓았어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었어

그날의 너를 잊지 않아

세월을 건너가는 생각이 있어

나는 지금 당장 너를 만나고 싶어"

      

[출처] 変わらないもの(변하지 않는 것) - 오쿠 하나코 (시간을 달리는 소녀 ost) / 가사 / 해석|작성자 맛센빠이


중학교 2학년 때 일본어 가사를 한글로 적어 놓은 가사지를 프린터 해서 달달달 외웠다. 그 탓에 지금도 어렴풋이 흥얼거릴 수 있는 일본어 가사 노래이다. 당시에는 평범하고 무난한 일상이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슬픈 사랑에 빠져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영화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특히 "미래에서 기다릴게."는 뭇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문득 이제 와서 궁금해진다. 시간을 달려서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었던 소녀가 찾던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녀가 아주 간절하게 시간을 거꾸로 돌렸지만, 그것은 무산되었고 소녀의 사랑은 자신이 있던 미래로 그녀를 과거에 남겨두고 떠났다. 난 방금 깨달았다. 시간은 흘러서 모습을 많이 바꾸지만 '기다리는 마음'만은 변치 않는다는 것 아닐까. 난 그것을 16년이 지나서 깨달았다.


티비에서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일본인 여자와 외국 병사가 떠올랐다. 그들의 외양은 많이 늙었고, 그들은 서로 한때 사랑했지만 각자 배우자 혹은 자녀가 존재했다. 그런 그들이 황혼에 들어서서 다시 마주했을 때 마법처럼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던 그때로 되돌아갔다. 마음 한편에 계속 간직한 기다림이 부린 마법이 아닐까. 슬픔이 눈물 흘리기도 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잊고 살아가기도 하기를 반복해 쭈글쭈글해진 주름 사이로 그들은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렇지 않고서 그런 표정이 나올까 싶다.


그리고 '사랑보다 죽음보다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란 표현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보다 달콤하고, 죽음보다 씁쓸하며, 혁명보다 더 새로운 것.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름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인 평화가 아닐까. 더는 무엇인가를 갈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세상. 어쩌면 화자는 해장국밥집처럼 공평하게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꿈꿨던 것 아닐까.



우리가 말없이 기다리는 것은

해장국밥처럼 그렇게

쉽게 나올 것 같지 않다.

 

끝은 아주 비극적이다. 기다리고 있지만 쉽게 나올 것 가지 않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결말까지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다. 나는 이 시를 다 읽고 정양 시인이 유명하지만 왜 유명한지 알게 되었고, 왜 대학교 전공서적으로 골랐는지 감탄하게 되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이다.

내가 이 사진을 왜 찍었냐면은 내가 이 시집과 이 시를 왜 골랐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나의 책상은 짙은 갈색 나무 책상이다. 그냥 다이소 유선 마우스만 쓰자니 소음이 너무 크다. 그래서 이 책 저 책 다 올려봤는데 저기 저 정양 시인의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가 제일 소음이 덜했다. 그래서 저게 내 마우스 받침대로 쓰이다가 어느 날 첫 번째 시집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보면서 저 멍멍이 스티커, 유선 광마우스, 거대한 LG모니터, 내 오른손까지 모두 지고 있다. 맥북 작년 10월에 사놓고 다음 해 2월에서 자격증 시험 준비하는 나의 죄책감이 저 안에 다 담겨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거창하게 느껴졌던 시집 제목이 나의 일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게 쉽게 나오는 해장국밥은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 기능사>이고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것은 <취업>이다.


이 시집의 책 제목을 구다보고 있으니까 벌레 같은 내 삶도 한 줌의 무게는 지구상에서 나간다고 위로를 해주는 것 같다. 하루에 하나씩 초콜릿처럼 꺼내 먹어요. 자이언티 노래처럼 하나씩 시를 꺼내먹겠다. 그 옆에 향긋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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