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담 Apr 19. 2024

오다, 서럽더라

래여애반다라, 이성복 시인의 시집(2013)

래여애반다라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당시에는 있어 보였다. 더불어 이성복 시인을 한창 배울 때라 아는 시인 이름이라 덥석 시집을 샀다. 그리고 책을 펼쳤을 때 상당히 후회했다. 내가 상상하던 시가 아니었다. 느껴지는 게 없고, 한자는 많았으며, 성(性)과 관련된 단어가 꽤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영 안 읽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읽고 그 당시 마음에 든 시 옆에다가 하트를 그려놨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별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래여애반다라 시집에서 하트는 좀 많이 봤는데 별은 처음 봤다. 제목은 <화장실에서>이고 5살 꼬마아이를 보고 나이 먹은 시인이 마치 본래 큰 바퀴벌레 뒤에 새끼 바퀴벌레가 따라다니지 않는 이유는 큰 것이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갑자기, 노란 작은 오이 꽃 속의 진딧물처럼 내가 부끄러워졌다'고 한다. 내가 시인의 모든 시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시인은 시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오줌을 놓는 순간에도 시적인 순간으로 포착하고, 오줌을 누는 것도 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성복 시인을 현대시 읽기 수업 때 기말고사를 보는데 시 2편이 나왔다. 당시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시집에서 나온 시로 서사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정서가 아름답게 잘 깔려있었고, 다른 시는 황병승 시인의 여장남자 시코쿠로 난해하고 철학적이며 읽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시였다. 나는 그때 당연하게 시골 풍경이 잘 묘사되고, 고즈넉하고, 쓸쓸함이 담김 이성복 시인의 시를 골랐다. 그때부터 내 취향은 이해가 가고 조금은 감성적인 시를 좋아했었나 보다.


찬찬히 다시 시집을 떠둘러보면서 느낀 점은 성적인 단어를 과감했다는 것, 의외로 감성적이고 아기자기한 시도 있다는 점, 어떤 시는 내가 좋아하는 모호하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시까지. 내게 래여애반다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종합선물 세트 같다고 답할 것 같다.


어디서 래여애반다라의 시집에는 생(生)-사(死)-성(性)-식(食)이 나온다고 하였다. 정말 책을 관통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어서 가져와봤다.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많이 겪었을 것이고, 성적인 사랑과 식욕을 푸는 일 또한 골백번 더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쓴 시라서 더 무게감이 있게 와닿기도 하고, 어떤 것은 모르는 채로 남겨놓아도 편안해지는 것 아닐까.

(출처 https://pedia.watcha.com/ko-KR/contents/boqgwr9)


정말이지 어떤 시를 고를까 고민했다. 내 취향인 모호하며 구체적인 것은 이미 있고,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고찰하는 것 역시 죽음이라는 주제가 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시창작연습 1>이다. 대학 다닐 때 교수님이 시에 대한 시를 쓰면 '너네가 얼마나 시를 썼다고 벌써부터 이런 시를 써!' 20대 새내기들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1982년 제2회 「김수영문학상」, 1990년 제4회 「소월시문학상」, 2004년 제12회 「대산문학상」, 2007년 제53회 「현대문학상」, 2014년 제11회「이육사시문학상」을 수상한 이성복 시인이 쓴다면 그때 그 교수님도 아주 쉽게 납득하실 것 같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4%B1%EB%B3%B5)


그리고 저 <시창작연습 1>은 성(性)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어쩐지 시인의 자기 고백적인 쓸쓸한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 만들어낸 씁쓸한 고백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박진영이 작곡한 니가 사는 그집 같은 느낌을 이성복 시인이 이 시에서 표현한 것 같다. 어쩌면 누구나 다 지난날을 떠올리고 후회한다. 하다 못해 우리 아빠도 너네 엄마 만나기 전에 선 본 여자가 엄청 예뻤는데 말을 한마디도 못해서 퇴짜 맞았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러고 보면 화양연화에 나온 장만옥이 시집 래여애반다라에 등장한다. 거기서도 남편이 있는 여자와 아내가 있는 남자가 눈이 맞는 내용이다. 초등학생 때 배운 사랑의 정의와 30대가 내린 사랑의 정의 그리고 60대가 내리는 사랑의 정의는 모두 다른 모양이지만 몸통은 하나일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이성복 시인이 시창작연습 1에서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는지 조금 더 집중하면서 시를 타이핑해보려고 한다. 그 시는 단단하면서 단조로운 서술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나는 중구난방으로 보이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시보다 내가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밀집도 있는 시가 좋다. 내가 시창작연습 1이 그러하였다. 시가 단편의 이미지가 깔려있어도 유기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내게 와닿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시창작연습 1은 걸쭉하면서도 거무튀튀한 사랑 얘기이자 삶 얘기 같았다.



시창작연습 1



                            이성복


우리 집 방바닥은

너무 높거나 너무 낮다

너무 높을 때는 아내가 엄마 대신

나를 몹시 때릴 것 같고

너무 낮을 때는 봄 대신 가을이 쳐들어와

내 기쁨 패대기칠 것 같다

나는 우리 집 방바닥이 계단처럼

여러 칸이었으면 좋겠다

첫번째 계단에는 결혼하기 전

알던 여자를 눕히고

그 바로 위 계단에는 그녀가

낳아보지 못한 내 아이를 누이고 싶다

눕기 싫다고 아이가 앙탈하면

내가 대신 기저귀 차고 드러눕고 싶다

아니면, 피로에 지친 암캐미처럼

나 혼자라도 알 까고 싶다

그리고 문득 눈 감으면

그 모든 계단들이 부채살처럼 접혀

아무도 내 생각 들여다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출처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 문학과 지성사 2013)



내가 래여애반다라 시집에서 느낀 것은 똑같은 제목에 뒤에 숫자만 바뀐 시 제목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제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름은 고유한 것으로 고유한 느낌을 주는 것인데 이름이 같은 시가 여럿 있으면 개성이 잘 안 느껴지는 기분이다.


가령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수진이란 이름이 2명 있었는데 그 둘을 키 큰 수진과 키 작은 수진으로 나누었다. 그냥 선생님이 '수진이가 이 문단 읽어봐.'라고 하면 두 명의 수진이는 누구를 부른 것인지 헷갈릴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가 마음에 든다고 적으면서 든 생각은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생각과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눈이 있다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있고, 신체의 일부인 눈도 있다.


눈이라는 제목으로 먹구름 잔뜩 낀 눈 내리는 날의 풍경을 얘기할 수도 있고, 검은 바다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어느 눈동자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꼭 하나의 이름에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 시를 너무 좋아하니까 하게 된 생각 같다. 좋아하면 뭐든 예뻐 보이는 법이니까.


우리 집 방바닥은

너무 높거나 너무 낮다


나는 첫 문장이 꽤 심플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곱씹을수록 도대체 방바닥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한옥이면 방바닥이 낮고 문이 위에 있으니까 알 수 있다. 그리고 방바닥이 높다는 것을 알려면 문이나 혹은 다른 것에 비해 높다는 것을 비교해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개념은 나의 키처럼 내가 키가 작은지 혹은 높은지는 나와 같은 성별 같은 나이대의 여성과 비교해야 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어쩐지 이 방바닥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다는 너무 부유하다와 너무 가난하다로도 들리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상황은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져서 불행한 우리 집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너무 높을 때는 아내가 엄마 대신

나를 몹시 때릴 것 같고

너무 낮을 때는 봄 대신 가을이 쳐들어와

내 기쁨 패대기칠 것 같다


여기서 너무 높을 때는 아내가 엄마 대신 나를 몹시 때릴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왜 너무 높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했을 때 '너무 높다' 앞에 생략된 말은 '방바닥'이 아니라 '부유할 때' 같다. 어려서는 엄마의 손길 안에서 키워지다가 장성해서는 아내의 관리 안에 속하게 된다. 여기 나오는 화자는 엄마와 아내를 동일시하며 두려운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 둘은 자신을 구속하며 무엇인가를 계속 희망하고 갈구해서 화자가 스스로 부담을 느끼는 상황처럼 읽힌다. 엄마에게는 아들로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아내에게는 남편으로서 가장의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너무 낮을 때는 봄 대신 가을이 쳐들어와 내 기쁨 패대기칠 것 같다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준이 너무 낮아진다는 것은 '가난할 때'로 읽힌다. 여기서도 화자는 계속 불안감에 떨고 있다. 따뜻한 봄 대신 쌀쌀한 가을이 쳐들어 오는 것도, 그 가을이 내 기쁨을 패대기칠 것 같다는 것도 모두 폭력적이다. 누군가가 나의 집에 쳐들어오고, 나의 기쁨을 망가뜨릴 것 같단 표현은 꼭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듯한 사람의 심정 같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까 겁이 난 사람의 심정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시창작연습 1의 화자는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 놓인 사람 같다.


나는 우리 집 방바닥이 계단처럼

여러 칸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우리 집 방바닥이 계단처럼 여러 칸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방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도 아니고, 계단처럼 여러 칸이라니. 보통 계단하면 상하관계가 분명하다. 아래에서 위로 점층적이고, 층층이 긴밀하게 하나로 이어져있고,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모두 보인다는 점이다. 정말 만약에 내 방이 계단처럼 여러 칸이라면 1층은 침실, 2층은 서재, 3층은 욕실, 4층은 작업실, 5층은 바, 6층은 카페 등등 꾸미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방바닥이 계단처럼 여러 칸이 되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불편할 것 같다. 나는 화자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곁에 두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미 전문을 읽은 나는 이 뒤에 나올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첫번째 계단에는 결혼하기 전

알던 여자를 눕히고

그 바로 위 계단에는 그녀가

낳아보지 못한 내 아이를 누이고 싶다


바로 이거다. 첫번째 계단에는 '결혼하기 전 알던 여자'를 눕히고, 그 바로 위 계단에는 '그녀가 낳아보지 못한 내 아이'를 누이고 싶다고 한다. 바로 첫번째 계단에 눕힐 만큼 화자는 결혼하기 전 알던 여자가 그립고 소중했나 보다. 그런 첫번째 계단보다 더 위인 것은 그런 사랑하는 그녀가 낳아보지 못한 내 아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여자보다 더 끌리는 것은 나의 혈육이란 생각이 든다. 화자와 피로 이어지고, 화자가 직접 만든 아이는 사랑보다 더 뛰어나고 더 끌리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화자의 근원적인 목적이고 그러기 위해 열렬히 사랑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 대목에서 박진영의 니가 사는 그집을 떠올렸고, 우리들이 모두가 갖고 있는 첫사랑이 순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저렇게 배덕할 수도 있음을 적나라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되게 다시 주목하게 된 단어가 '눕다'이다. 여자를 눕히다는 굉장히 색정적이게 와닿는데, 아이를 눕힌다는 것은 신성하게 와닿는다. 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색정적일 수도 신성할 수도 있음을 새삼 이렇게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거침없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동물적이란 생각이 들고, 뒤에 나오는 '암캐미'와도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사회화되어 어떤 일정한 규범 안에서 살고 행동하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는 이런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당장 익명을 둘러싼 랜덤채팅에는 일상에서 쉽게 꺼낼 수 없는 별 말을 다 내뱉는다. 그런 것처럼 누구나 다 내면에는 그런 욕망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느냐 마느냐의 간극에서 일반인과 범죄자가 갈라지는 것 같다. 이것은 시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시인이 왜 시인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눕기 싫다고 아이가 앙탈하면

내가 대신 기저귀 차고 드러눕고 싶다

아니면, 피로에 지친 암캐미처럼

나 혼자라도 알 까고 싶다


나는 여기서 꽤 큰 반전을 느꼈다. ''눕기 싫다고 아이가 앙탈하면, 내가 대신 기저귀 차고 드러눕고 싶다'라고 과감하게 화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니면, 피로에 지친 암캐미처럼, 나 혼자라도 알 까고 싶다'라고 한다. 이것은 화자가 아이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모두 자기가 하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나는 보통 앙탈을 부린다는 여자가 남자에게 부린다로 쓰인다고 생각했다. 근데 실제로 네이버에 검색하니까 '생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짓.'이란 말의 뜻도 있어서 아이가 부리는 앙탈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부리는 앙탈은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고 꾀를 부리거나 피하여 벗어나는 짓.'이란 것도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다 큰 남자가 기저귀를 차고 드러눕는 것이나, 피로에 지친 암캐미처럼 혼자서 알을 까는 것은 꽤 야하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룰 수 없는 것을 스스로 실현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고 가엾게까지 느껴진다. 몸은 다 컸지만 아직 덜 자란 애가 엄마 놀이 아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야하게만 읽히던 것이 반대로 안타깝게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을 이성복 시인의 시창작연습 1을 보며 새삼 느꼈다.


그리고 문득 눈 감으면

그 모든 계단들이 부채살처럼 접혀

아무도 내 생각 들여다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화자는 문득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문득 눈 감으면, 그 모든 계단들이 부채살처럼 접혀, 아무도 내 생각 들여다보지 말았으면 좋겠다'라고 한다. 여기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잠에 들고 생각이 끊어지기 직전을 난 떠올렸다. 그때 화자가 했던 층층이 쌓인 못되고 야하고 사회에 반하는 생각이 부채살처럼 접히기를 화자는 소망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그런 화자의 생각을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현실에 실현되면 안 되고 동시에 화자의 생각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까지는 멈출 수 없나 보다. 현실에서 사랑했던 여자를 찾아갈 수도 없고, 그녀와 화자 사이에 아이도 낳을 수 없지만 만약이란 말로 상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부채살로 접는 것이 그의 추악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좁혀진 어깨와 낮아진 자존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시에서 나온 화자는 당당하거나 즐거운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쫓기고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분명 자신이 가진 집도 있고 자신의 아내도 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온 화자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헛된 이상을 좇는 그런 사람일까. 그렇다기보다 누구나 다 위태로울 때가 있고, 불안한 현실을 외면하고 이루지 못한 것을 되새김질할 때가 있다. 나는 이 시에서 나온 화자가 늘 이런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에만 이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계단처럼 층층이 쌓기도 하고 또 저렇게 부채살처럼 접을 줄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알고서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성인인 것 같다.



나는 처음 래여애반다라가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오다, 서럽더라'는 도대체 어떤 말일까 어렴풋이 느꼈지만 확 와닿지는 않고 대충 그런 느낌인가 보다 했다. '무엇인가가 왔고, 그리고 나는 서러워졌다' 이런 오고 가는 이야기 같았다. 봄이 왔고, 나는 꽃이 떨어져서 서럽더라 이런 것도 그에 해당할 것 같다. 무엇인가 찾아오면 언젠가 떠날 날이 있다. 그게 자의적일 수도 있고 수동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숱하게 많은 탄생과 이별을 거쳐오게 되어있고, 사랑과 결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번 사랑이 끝사랑인 것만 같았는데 깨질 때도 있고, 또 결혼하고 부부가 되어 애도 낳았는데 이혼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영원한 것은 없고 똑같은 일들은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성복 시인은 그런 인생사를 모두 겪었고, 생(生)-사(死)-성(性)-식(食)을 시인으로서 아주 멋지게 표현했다. 내가 만약 성적인 얘기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저렇게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면서 무게감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오랜 시간 시를 써온 이성복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들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래여애반다라를 사고 읽었을 때 얼마나 후회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돈이 아까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알까.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를 읽고 이런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사람의 첫인상이 꼭 다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첫인상은 너무 상냥한데 알고 보니까 아주 괴팍한 사람일 수도 있고, 첫인상은 아주 싸가지가 없는데 알고 보니까 친절한 사람일 수도 있다. 꺼진 시도 다시 들여다보자. 혹시 불 타오를 수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