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10시간을 거슬러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이라면 초저녁일 테지만 낯설어인지 새벽 2시쯤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늦은 시간과 어두워진 하늘이 여행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예약한 숙소가 런던 어디에 있는지, 공항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오류임이 분명했다.
나노 단위로 계획을 짜는 파워 J형인데 어째서인지 이번 여행은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 됐다.
(물론 한 달 여행에서의 모든 숙소, 이동 교통편, 얼리버드 티켓 등은 구비 및 예약 완료 상태ㅋ)
일단 침착하게 공항을 빠져나와 오이스터카드(Oyster card, 런던에서 사용하는 선불 교통카드)를 구입했다. 이때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해 준 판매원 덕에 지금까지도 런던을 떠올리면 따뜻한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친절한 판매원 덕에 무사히 공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친절하게 물어 준 덕분에 내가 가야 할 숙소 위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내가 무사히 지하철에 오를 수 있었던 건 판매원의 친절함 덕분이었다.
또 한 가지 다행인 건 숙소가 엘리펀트 & 캐슬(Elephant & Castle)역 부근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정확한 주소가 적힌 메모가 백팩 안에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쪽지를 꺼내는 순간 가방 안의 모든 물건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이땐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작 숙소를 찾아야 할 땐 주소를 적은 종이가 있단 사실을 잊어버렸다.) 로밍을 신청하지 않았고, 공항에서 현지 유심카드를 사는 것조차 잊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엘리펀트 & 캐슬역에서 무료 Wifi가 잡힌다는 실낱 같은 정보에 내가 가진 모든 패를 걸어보기로 했다.(무모했음을 인정한다. 절대 그래선 안 됐다. ㅠㅠ)
기차같아 보이지만 지하철, 한 지하철 안에 좌석 배열이 여러 가지라 신기했다. 런던이 처음인 이방인이 여기 있습니다.
낯선 지하철에 오르는 순간 아늑함이 느껴졌다. 안도의 한숨까지 나왔다. 심지어 긴장이 풀려서였는지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을 입은 무리가 나를 에워싼 생경한 상황 속에서도 무거워진 눈꺼풀을 그냥 그대로 닫아 버린 채 그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까지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떨결인지,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내 몸 안에 장착된 여행레이더가 가동된 것인지, 무사히 엘리펀트 & 캐슬역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기운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번에 잘 도착한 건 아니고 졸다 깨다, 내리고 타고를 반복, 피카딜리 서커스 역을 지나서야 제대로 된 방향에 안착했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100%의 적중률을 자랑한다. 나는 ‘설마’라는 변수의 마수에 빠져버렸다. 그것도 당황과 황당의 최대치에 다다랐을 때 말이다. 엘리펀트 & 캐슬역에선 무료 wifi가 잡힌다고 했지만…, 전혀! 통화 신호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본격 눈치게임 시작. 만약 도박판이었다면 내가 가진 패를 몽땅 다 걸어버렸으니 망조의 길만 남은 것이다.
‘침착하자. 침착해. 우선 역을 빠져나가 길을 물어봐야겠어! 그런데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 거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런던 지하철답게 인위적으로 꾸며진 미로공원보다도 훨씬 더 꼬불꼬불 어두운 통로가 여러 갈래로 나눠져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숨긴 채 말이다.
아날로그 감성이 폭발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무조건 이 역을 빠져나가야 한다. 나는 서둘러 한국에서 가져온 19kg 24인치 캐리어, 등에 멘 백팩 여기에 크로스백과 DSLR을 몸에 두르고 좁고 가파른 무한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사육당하며 몸속 깊이 고이고이 쌓아온 백만 칼로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곡절 끝에 도착한 곳. 그러나 이곳은 어마어마한 미로를 숨긴 엄청난 역이었다.
몇 년 전, 영화 히말라야를 감명 깊게 본 후 네팔 트래킹이 내 인생 버킷리스트 1순위 었다. 그러나 런던 지하철의 첫 계단을 오른 순간 나는 ‘네팔 트래킹’을 버킷리스트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오늘 이후로 내 인생에 등산이란 없다. 다음 생에도 가지 않을 테다.’ (평생 오를 언덕, 계단은 이날 다 오른 느낌이었다. ㅠㅠ)
계단을 서른 개쯤 올랐을 때 이미 내 체력은 방전직전이었다. 강도가 내 앞으로 성킁성큼 다가와 칼을 들이민다 해도 바로 옆 사람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애써 가져온 짐을 지금 당장 내팽개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깐이지만 짐을 버릴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짐들을 바리바리 들고 간 죄ㅠㅠ
그 순간 그 어느 것보다도 밝게 빛나던 나만의 구원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어?!’ 놀랄 틈도 없이 내 캐리어는 구원자의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유럽여행 시엔 낯선 사람에게 짐을 맡기지 말라는 글을 봤지만, 지금 설령 저 사람이 내 짐을 가지고 간다 해도 원망조차 들지 않을 것 같았다. 혹여 돈을 요구한다면 20파운드 정돈 감사한 마음으로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나의 구원자는 돈을 요구하지도, 내 짐을 가지고 가지고 않았다. 무사히 지상까지 무려 안전하게 들어다 주었다.
‘와! 어쩜! 고마워요 런던 천사.’ 세상은 매우 아름답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역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출구도 있었다. 단지 내가 수많은 출구 중 가장 오르기 힘든, 사람이 거의 없는 출구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아무렴 어때. 구원자 덕분에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왔으니, 숙소만 찾으면 된다.
하지만 여전히 wifi는 잡히지 않았고, 급하게 데이터 로밍을 신청하려 했지만 그 조차 되지 않았다. 길을 물어보려 해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칠흑 같은 밤, 캄캄한 런던 하늘보다 내 머릿속 절망감이 더 새카매지고 있었다.
숙소 도착 후 안정감을 취하려 창밖 풍경을 찍어 보았다.
좌절의 순간, 기적적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심지어 발걸음 소리가 어찌나 다정하던지 눈물이 나려 했다. 사람이다 사람!!!! 런던에서의 두 번째 기적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인기척을 따라갔다. 그곳엔 버스를 기다리던 여성이 전화를 하고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통화기가 귀에서 떨어지자마자 눈동자에 간절함을 가득 담아 전화를 빌릴 수 있냐 물었다. 그녀는 내 짐을 슬쩍 본 후 전화번호를 보여주면 직접 걸어주겠다는 대답을 했다. 만약 짐이 없었더라면 절대 전화를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겐 나와 소매치기가 동급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에겐 무겁디 무거운 짐이 잔뜩 있으니 말이다.
만약 아까 지하철 역에 짐을 버리고 왔더라면, 난 이 부근 모든 건물의 초인종을 하나하나 눌러 내 숙소를 찾던지, 다른 숙소를 찾아 떠나야 했을 것이다. 내가 그리 나쁘게 살진 않았구나 라는 자만심이 살짝 들던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세상은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당황했을 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고 할까. 분명 내 가방 속엔 주소가 적힌 바우처가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