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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시작

by 라타치

밤 시간에 대면 수업을 듣는 건 육아 후 처음이다. 3개월 과정인데 잘 해낼 수 있을지. 여기서 잘한다는 건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만 아프지 않으면 된다.

글을 쓰다 보면 출판에 관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뚜렷한 목적과 성실함이 부족하기에 나를 채찍질하고자 3개월의 수업을 신청하였다.

'작가양성과정'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정에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설렌다.


5시 전에는 하교하는 태정이와 태영이의 저녁을 차려주고 정리까지 하면 늦어도 6시에는 나설 수 있을 거라고 계획을 세웠다.

첫날부터 삐그덕. 하필이면 태정이의 9월 모의고사 날이다. 체크를 못한 내 잘못이다. 시험이 5시에 끝나니까 하교하면 5시 30분이 됐겠는데 생각했다. 부지런히 저녁을 차리고 기다리는데 태정이가 안 온다.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첫날은 일찍 가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 듣고 싶었다. 아직 '김은지'라는 독립된 인간으로 행동하기엔 어려운가 보다.

왕성한 식성을 보여주는 중3 태영이는 뒤돌아서면 배고프다고 하고 고2인 태정이는 성장기의 막바지로 더 잘 먹여야겠다는 압박감이 있다. 이데로 나가면 분명 라면으로 때울 텐데 어쩌나 싶다.

음식이 식어 맛없더라도 꼭 챙겨 먹으라고 편지를 쓰고 저녁상을 차리고 나왔다. 왠지 찝찝하다.

서둘러 가방을 메고 나가는데 태정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왜요?"

"왜 안 오나 하고. 엄마 수업받으러 가야 하는데. 저녁 먹어야지."

"친구하고 농구하고 갈게요."

그래, 시험도 끝났는데 한 판해야지. 놀아야지. 최대한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마가 오늘부터 저녁에 수업 들으러 가야 한다고 했잖아. 저녁 차려놓을 테니 먹으렴. 밤에 보자."

"네~"

나도 모의고사 날을 몰랐는데 엄마의 수업을 기억할리가.

그래도 빠지지 않고 첫날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horses-3697217_1280.jpg 출처 PIXABAY

수업 장소는 신혼을 시작했던 동네의 도서관이다. 태정이를 임신했을 때 열심히 다녔던 그곳. 그림책을 처음 접하며 태교책을 열심히 빌렸었다. 태정이를 낳고 내 수업을 들으러 17년 만에 가는 길.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니. 무탈하게 지나온 세월이 감사하게 여겨진다.

19시 수업이라 그런지 직장인들이 많았다. 남자도! 도서관 수업에 남자가 참여한 건 처음 본다. 대부분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인 오전 시간대 수업을 들어서 그럴 수도. 20명의 수강생이 빽빽하게 들어앉았다. 한 명씩 소개하는데 책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작가들도 3명이나 된다. 모두 비문학책을 출판했고 문학책을 쓰고자 참여했단다. 강사님도 매우 인자하시다. 얼마 전에 은퇴한 국문학과 교수님인데 수업 내내 웃는 얼굴로 칭찬을 가득해주셨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셨을 듯.

수업 후 글쓰기와 합평의 시간. 나의 글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이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성격이 급한 나에게는 말보다 글쓰기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merry-christmas-4297386_1280.jpg 출처 PIXABAY

다음은 오정희 작가님의 <일상의 작은 것에서 소설의 광맥을>이라는 글을 읽고 쓴 글이다.


오정희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나의 국민하교 시절이 소환되었다.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6학년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문을 연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이 짧게 대화를 나누시고는,

"김은지, 나와라."

맨 앞자리에 앉아있어서 앞으로 나가는데 어렵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일인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쭈뼛쭈뼛 일어났다.

"지난주에 있었던 백일장 대회에서 은지가 뽑혔다. 뽑힌 학생은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된다. 선생님 따라서 지금 교무실로 가라."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우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글을 잘 쓰나 보다.'

6학년 이후로 그런 환호성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대표로 나갔는지 어쨌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환상이었나.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도 환상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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