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항공사의 통역 승무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나는 이탈리아에 갈 때마다 소도시들을 여행했는데
영화 리플리 (원제 : The Talented Mr. Ripley)의 배경이 된 이스키아에 간 것도 이탈리아 항공사에서 일하던 시기였다.
영화에서 '몬지벨로(Mongibello)'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섬의 실제 이름은 이스키아(Ischia)이다. 이스키아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로 '탁월한 섬'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영화 속 기네스 펠트로의 집 정원에는 싱그러운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다. 실제로 이스키아의 곳곳에서는 포도나무나 레몬나무, 오렌지 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섬의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이름은 Enaria 였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어로 '와인의 땅'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질 좋은 포도밭으로 유명했던 섬답게 이스키아 곳곳에서는 와인 농장을 볼 수 있다.
이스키아 여행 중 내가 묵었던 Air BnB는 언덕 위에 위치한 과수원에 딸린 별채였다. 아침에 모닝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던 과일나무의싱그러운 알맹이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햇살을 받고 주렁주렁 피어난 천국의 열매 같았다.
이스키아의 길거리 주스 가게에서 우리는 레드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영화 리플리에 '실비아'라는 캐릭터가 잠깐 등장한다. 주드 로 (디키 프란스 키)가 약혼자인 귀네스 팰트로 몰래 만나는 섬마을의 과일가게 아가씨이다. 주드로(디키 프란스 키)의 약혼자가 실비아의 상점에 들렀을 때 클로즈 업 되는 그녀의 표정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도도하지만 무표정하지 않으며, 살짝올라간 눈꼬리와 입꼬리로 번지는 미소는 새콤한 레몬 조각을 한 입 베어물었을 때 나오는 얼굴같다. 수박 같은 미소를 짓는 기네스 팰트로와달리 이스키아에 열린 레몬처럼 새콤한 미소를 짓는 실비아의 얼굴은 매력적이었다. 이탈리아 항공사를 다니는 동안 종종 보았던 이탈리아 여자들의 익숙한 표정이기도 했다.
영화 속에는 이스키아 섬의 아름다운 모습이 정성껏 담겨있다. 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노고가 느껴지는 장면이 많다. 특히 리플리(매트 데이먼)를 태운 하늘색 버스를 따라 카메라가 비추는 섬의 파노라믹한 모습은 내가 이스키아의 버스 안에서 본 모습과 닮아있었다.
나를 싣고 달리던 이스키아의 버스는 영화처럼 낭만적인 하늘색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형 버스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도시형 버스 안에서도 꽤나 낭만적인 일이 일어났으니, 검정 베레모를 쓴 이탈리아 노신사가 갑자기 버스 안에서 내게 다가와 빨간 장미꽃을 내민 것이었다. 너무나 낭만적인 섬사람의 환영인사였다. 누구에게 가려던 빨간 장미꽃이 내게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갑자기 어디에선가 나타난 장미꽃 한 송이는 이스키아에 대한 나의 인상을 매우 낭만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다이다. 바다 한가운데의 보트에서 리플리는 디키를 살해한다. 리플리와 죽은 디키를 실은 보트는 넓은 망망대해에 표표히 떠있다. 그리고 화면을 꽉 채우는 바닷가는 쏟아지는 햇살을 튕겨내며 반짝인다. 마치 리플리의 허영과 끔찍한 범죄마저도 허공으로 모두 튕겨내고 있는 듯하다.
이스키아의 반짝이는 바닷가
"해가 비추는 것 같지, 눈부셔. 그러다가 돌아서면 아주 차가워. 관심이 있을 땐 세상에 둘도 없이 잘해주니까. 새로운 사람만 만나면 언제나 저래"
영화 속 디키 그린리프 (주드 로)에 대해 그의 약혼자(귀네스 팰트로)는 위와 같이 묘사했다. 나는 이 대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디키 그린리프라는 인물에 대한 간결하고도 또렷한 표현과 함께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이들은 함께 있는 사람을 갑자기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며 갑작스러운 외로움을 선사한다. 그것은 마치 홀로 모래사장에 앉아 드넓은 바닷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나는 한 때 이탈리아 남부에 집을 사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에 사는 동료들을 만나면 그곳의 사는 방식에 대해 자세히 묻곤 했다. 이탈리아 동료들은 '이탈리아는 빨간 사과 같지. 겉에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 안은 썩어있어' 라며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것과 그곳에서 사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라고 했다.
한 번은 비행기에서 이탈리아에 집을 사서 여름마다 이태리에 온다는 승객을 보았다. 칠십이 조금 안된 영국의 할머니였는데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역의 바닷가 앞에 집을 좋은 값에 구입해 매 여름을 딸과 함께 그곳에서 보낸다고 했다. (이태리의 남부는 집값이 저렴해 이태리 남부에 여름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유럽인들이 꽤 된다)
매해 여름 투명한 바닷가에 몸을 담그고, 신선한 해산물을 맛보며 무엇보다도 그 여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딸이 있다는 할머니는 참 행복해 보였다.할머니의 행복한 여름이 여러번 반복 재생되길 바랬다.
길을 걷다 만난 강아지, 루나 (달)라는 이름 때문인지 그 눈빛이 더 애달파 보였다.
이스키아는 온천으로 매우 유명하다. 영화 리플리에서는 이스키아의 온천이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잘 알려진 온천 관광지이다. 함께 이스키아를 여행했던 항공사의 동기 언니는 그 후로도 이스키아를 두어 번 더 갔는데 특히 부모님을 모시고 갔을 때 엄마가 너무 좋아하셨다고 했다. 온천을 좋아하는 한국의 어머님 취향에 잘 맞았던 것 같다.
절벽 아래 천연 온천수가 펄펄 끓는 곳에는 감자를 가지고 와서 삶아먹는 사람도 있다 하는데, 온천에서는 구운 계란과 식혜가 제맛이다. 언젠가 이스키아를 다시 가게 된다면 반드시한국의 비락 식혜를챙겨 가야겠다. 이스키아에서 맛보는 온천물에삶은 계란과 달달하고 시원한 식혜가 주는 환상적인 조합은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소금도 꼭 챙겨야겠다. 소금 없는 계란은 비리다)
절벽 아래 사람들이 누워있는 곳은 천연 온천이다. 이외에도 이스키아에는 온천풀이 잘 갖추어진 숙박시설이나 수영장도 많이 있다.
'프랑스에 몽생미셸이 있다면 이태리에는 아라곤 성이 있다.'는말처럼 이스키아의 랜드마크인 아라곤 성 (Castello Aragonese)은 이스키아의 관광 명소이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에서도 아라곤 성은 그 위엄한 풍채를 뽐내며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찍기 위해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다소 과장된 이미지와 성의 모습은 꽤나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아라곤 성 주변에는 아직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항구가 있다. 이 작은 항구는 영화 속 리플리(매트 데이먼)가 섬에 첫발을 내딛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웅장하고 기세 당당한 아라곤 성아래 허름한 항구에서 왠지 모를 매력을 느꼈다. 그작고 오래된선착장에는 오랜 세월 바닷바람에 길들여진어부의 고독함이 서려 있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스키아에서 출발한 영화 '리플리'는 후반부에 접어들며 그 배경을 북쪽으로 옮겨 간다.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로 이동하며 영화는 점점 어둡고 무거워진다. 나는 사실 아직까지 이태리 북부에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태리 북부가 남부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태리의 남부와 북부는 소득차가 많이 난다. 북부에서는 도시의 세련됨을 느낄 수 있고, 남부에서는 향긋한 바닷가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선택은 늘 후자이다.
영화 속 리플리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디였을까? 그는 도시도 바닷가도 아닌, 허영의 세계를 택하며 스스로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가 꿈꾼 허영과 허구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이스키아를 촬영 장소로 택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말해준다.
나는 언젠가 다시 '이스키아'를 갈 수 있기를 꿈꾼다. '이스키아'까지 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인천에서 로마를 거쳐 나폴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후, 나폴리 항구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들어가면 다다를 수 있다. 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이스키아는 '태양의 섬'이라는 별명답게 빛나는 바다보다 더욱 찬란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