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친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by 은진


붓을 잡은 손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있던 나무가 점점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풍성하진 않더라도 생기 있어 보이길 바랐는데,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더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나무는 단순한 형체가 아니었다. 저마다의 가지와 잎을, 고유한 색채와 빛에 따른 미묘한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다. 쉬울 거라 생각하며 붓을 들었지만, 그 순간부터 길을 잃었다.


어반스케치 시간이 끝난 후, 천변 길을 따라 걸었다. 머릿속은 방금까지 그리던 장면들로 가득했다. 평면적인 건물부터 원근감을 살린 도시와 농촌 풍경까지, 제법 잘 따라갔고 그 과정도 재미있었다. 적당히 스케치하고 비슷하게 따라만 해도 그럴듯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즐겁기보다 위축감이 들었다. 첫날부터 들었던 강사님의 칭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함께 배우는 수강생들의 완성도 높은 그림 때문일까?


어수선한 마음이 자연스레 길가의 나무들로 향했다. 반석천을 따라 늘어선 메타세쿼이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양쪽 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나무들이 오늘따라 더 위엄 있어 보였다. 흐트러짐 없이 곧게 선 채 빌라촌과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갈대와 물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 하지만 오늘은 그 나무가 궁금했다.


메타세쿼이아는 마치 같은 제복을 입고 똑같이 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저마다 다르게 자란 흔적들이 보였다. 가지마다 뻗은 방향이 달랐고, 잎의 모양도 같지 않았다. 곧은 기둥의 껍질은 매끈하기도 울퉁불퉁하기도 했다. 잎의 색 또한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노랗고, 또 어떤 것은 여전히 푸른 기운이 남아 있었다.


특히 섬세한 잎들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았다. 그런데 그 작은 잎들을 가진 나무가 천변의 4층 빌라보다도 높은 키를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니. 놀라웠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모습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 말투와 행동,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까지 살펴야 비로소 그 사람의 본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 왜 한쪽 눈이 더 작아?"

거울을 보니 정말이었다. 왼쪽 눈이 오른쪽보다 조금 더 작고 처져 있었다.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친구는 작은 차이를 금세 알아채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침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이웃도 떠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올라타더니 버튼을 눌러 문을 닫았다. 순간 기분이 상해 '배려 없네!'라고 속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거나, 머릿속이 복잡해서 나를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도로변 넓은 길을 뒤로하고 좁은 길을 택하길 참 잘한 것 같다. 벌써 천변 길은 작은 잎들이 적갈색으로 깔려 있었다. 그래, 잘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자. 상대를 이해하려면 가까이 들여다보는 수밖에. 그 고유의 무늬와 결을 발견할 때까지.

길은 부드러웠고 나는 그 계절을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