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 PD가 된 과정 2] 더보이즈 'Bloom Bloom' MV
※본 글은 1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MV 현장 치고는, 꽤나 큰 규모의 SET 촬영이었다.
함께 출근한 또 다른 현장연출부님과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긴장 속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현장을 둘러보니 생경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 거대한 세트를 마저 짓고 있는 세트팀,
· 단편영화에선 보지 못했던 커다란 지미집과 촬영 장비,
· 블루 천(후반 cg를 위해, 피사체 뒤에 세우는 background 천)을 대신할 거대한 호리존...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40~50여 명의 스태프까지.
드디어 상업 현장의 비하인드씬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고, 동시에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취침 시간(5시간가량) 제외, 45시간의 촬영은 시작되었다.
발바닥 힘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
나는 스스로 지구력이 좋은 편이라 자부했는데 (이래 봐도 '전국 소년체전 출신'의 딸이다), 안타깝게도 45시간을 견딜 체력은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체력보다 중요한 것이 여-을정 아니겠는가. 당시 '엄청난 여-을정'으로 업계에 발을 디뎠던 터라, 긴 촬영 시간에도 불구, 현장에서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현장연출부의 경우,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처해야 하는 포지션이기에, 모두의 눈에 가장 튈 수밖에 없다. 순발력은 물론 고도의 눈치까지 챙겨야 한다.
혹여라도 대처가 느릿느릿하거나, (누가 말해줄 때까지) 눈치껏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카메라 '롤'이 돌아가기 직전의 예민한 순간을 상상해보시라.
아티스트와 감독, 카메라팀, 조명팀 모두의 시선이 나를 기다린다.
아무 긴장 없이 멍 때리고 있다가, 아티스트로 하여금 '(완벽한 퍼포먼스를 위한) 현장 준비가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면 분위기가 곧바로 냉각될 수 있다. 프로들의 세계에 들어와서 아무런 서포트도 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을 누가 인정하겠는가. 그게 아니라도, 딜레이에 관대하지 않은 카메라 감독님의 신경을 건들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아티스트가 아닌 나 때문에 컷이 지체되거나 처음부터 다시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최악이다!).
2-3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하는 MV 특성상, 딜레이를 줄여 아티스트의 컨디션을 지지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프로덕션의 입장에서는 소속사가 클라이언트이기 때문에, 아티스트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 데에 현장 스태프 모두가 힘써야 한다.
결과적으로, 촬영/조명/미술&세트/연출제작부(여기서 소속사 스태프(분장, 의상)에 대한 언급은 제외하겠다) 등 각자의 역할에 있어 정확하고 신속하게 세팅을 하고, 변수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요구된다. 현장연출부 또한 이 리듬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촬영 현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육체적 노동과 고도의 정신력이 모두 수반되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했다.
·연출부 막내가 하는 모든 수발 (수발이요 수발. 욕일 수도 있음 주의)
·촬영 스팟 이동할 때마다 모니터 테이블 새로 세팅 (대형 스피커, 모니터, 모니터 선, 마이크, 테이블, 의자 등 '연출부 비품' 모두 들고 이동)
·미술팀 세팅 지원 (보통 현장에서 미술팀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소품을 옮기거나 세팅할 때 연출·제작부와 미술팀을 지원한다)
·제작팀 형들과 헤이저/포그머신 분사 & 자연스럽게 뽀개기 (가장 간단한 특효라 할 수 있다, 영화 촬영에선 전문특효팀이 이를 담당한다)
·제작팀 형들과 와이어 당기기 (...)
....?!?
와이어라니, 이런 시나리오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와이어액션이 필요한 촬영은 무조건 전문적인 와이어팀(무술팀)이 진행해야 한다. 당시 촬영에 와이어팀이 오긴 했지만, 덕션 쪽에서 예산을 아끼느라 실장님 한 분만 나오셨다. 와이어를 설치하고 관리, 감독을 해주시긴 했지만 이를 당기는 것은 스태프들의 몫. 너무 황당하고 치가 떨리는 경험이라 기억이 온전치 못할 수 있는데, 대충 10명 정도가 양쪽으로 당겼던 것 같다. (참고로 이렇게 줄을 직접 당기는 방식은, 와이어 액션 원리 중 하나일 뿐이다. 좋은 장비일수록 이런 고생은 불필요할 것이다.)
아티스트가 날아오를 때마다, 와이어를 당기는 누군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렇게 굵은 철사를 쭉, 쭉 아래로 당기다 보면, 손바닥을 비롯해 목과 어깨· 상반신 전체에 무수한 알이 밴다.
그 시간이 새벽 4시 무렵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가치
누군가는 현장연출부로서의 이러한 경험이, 아무런 전문성도 없이 몸만 쓰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훗날 연출가가 될 내 모습을 그리며, 모든 업무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진행되는 촬영 환경에서 응당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사실 내 롤을 수행하며 어려운 점이 없던 건 아니었다. 이날 함께 간 또 다른 연출부원과 나는 운명의 장난처럼 전혀 다른 롤을 맡게 되었는데 그분은 감독 테이블 의자에 앉아 음악을 끄고 켜는 일을 맡게 되었다. 내가 새벽까지 뛰어다니는 동안에도,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딸깍 누르는 힘만 쓰면 충분한 일이었다. 우린 동일한 직책, 동일한 인건비로 고용된 것이었기 때문에 몸이 아파가며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혀 신경이 안 쓰였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쩔 것인가. 시간이 갈수록 오기가 생겼고 결국 와이어까지 당겨버린 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왠지 손해 같은’ 이 시간을 그저 충실히 보내고 나니 기회가 연달아 찾아왔고, '아르바이트생' 신분이던 첫 촬영으로부터 4달 뒤, 3억이라는 큰 예산을 운용하는 프로듀서가 되었다.
발바닥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뛰어다닌 시간. 그때를 돌아보니 남들이 보기에 보잘것없는 일도, 내가 어찌하냐에 따라 아주 보잘것 있어질 수 있음을 느낀다. 돌고 돌다가 문득 돌아보면, 그 일을 선택한 정당한 이유가 본인 안에 존재함을 느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가치는, 자기 자신만이 정의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가라앉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2편을 마무리한다. 다음 편에는, 첫 촬영 이후 겪은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을 차례로 다뤄보겠다.
이 시리즈 [뮤직비디오 PD가 된 과정]을 연재하는 소기의 목적은 '어떤 분야에 있어서도 뭐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지금의 나', 그리고 무슨 연유에 있어서든 (나와 같이) 오랫동안 스러져있는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지나간 짧은 도전적 경험들 속에서, 오늘날의 긴 방황을 끝내줄 아이디어를 찾아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