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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사자 Aug 20. 2021

A. 산티아고 가서 어른의 영어를 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가서 도 닦고 왔냐고요?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Holy 해지려고 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덤으로 도까지 닦아서 아주 가성비 좋은 여행을 하리라 다짐했다.




내가 하는 웹 일이라는 게 1년도 지나기 전에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 흔하다 보니 일의 흥미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영어 스피킹-녹음 앱.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이렇게 영어 콘텐츠가 널려있는데 이 콘텐츠는 제대로 세상에서 살아남을지 의구심은 하늘을 찔렀다.


많은 한국인의 ‘한’으로 남아있는 이놈의 영어 때문에 '태교영어'부터 '노인영어'까지 콘텐츠가 넘치고 넘치는 가운데, 또 하나를 보태기만 하면 어쩌나.


그래도 이왕 만들 거면 정말 사용될 만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팀원 내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재밌다. 도움이 된다. 좀 스스로 멋지다고 느껴진다. 발음은 둘째치고 어른처럼 말하는 것 같다. 긍정적이면서 다양한 반응에 프로젝트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뭐 그런 거다.. 우리끼리 서로 으쌰 으쌰 하는 뭐.. 훈훈한 뭐... 그런 거.


성인을 대상으로 이 영어 스피킹-녹음 앱의 목적은 2가지였다.


첫째는 흔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예상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날씨는 어때요?’라는 질문에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해요.’에 덧붙여 각 계절의 특징 정도는 덧붙여서 말해준다면 대화는 더 풍성해진다. 그리고 상대방 나라의 날씨를 물어봐주는 센스. 이제 상대방도 나와의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화는 핑퐁이니까.


둘째는 영어로 말하는 내 목소리가 어색해서 아예 스피킹은 담을 쌓는 우리. 오글거리더라도 녹음해서 배짱을 키우는 것이다.


의외로 영어로 말하는 나의 목소리를 어색해하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어민 음성을 듣고, 그다음 스크립트를 보면서 직접 녹음을 해본다. 그리고 나서 원어민과 나의 스피치를 비교해보면서 영어로 말하는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원어민 음성을 흉내 내면서 녹음을 반복해본다. 나의 초기 녹음 버전과 최후 버전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점점 나아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추가:소리 내서 책을 읽는 것도 좋다. 같은 맥락이다.)


5개월에 걸쳐 앱 개발이 진행되었다. 카테고리와 에피소드 리스트를 취합하고 전문가들에게 스크립트를 확인받는 것을 반복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해갔다. 내부 팀원들과 테스트를 위한 샘플 타깃들의 반응이 좋았다. 다행이긴 했지만 아직은 반심반의.




영어 스피킹-녹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산티아고를 걷기 위해 떠났다.


일, 관계, 미래 따위는 모두 던져버리고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산타이고까지 걸으면서 신과 대화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고 나는 누구인가도 고민하고 싶었다. 뭔가 걷기만 하면 그런 순간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득 찼다.



결과적으로 도 닦고 지나온 삶과 미래도 생각해보려고 산티아고에 갔는데. 개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주변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느라 머리는 복잡해졌다. 애를 써야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의외로 여행 떠나기 전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예상한 것보다 더 쓸모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매일 경험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도는 닦지 못했고, 경건해지지도 못했지만, 대신 힘들게 만든 영어 앱 콘텐츠에 대한 기록이나 남겨보려고 한다.


고양이를 만나면 인사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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