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Essay, writer. 최진영 씀
· 웹매거진 <쓰는 일>은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씀을 경험하는 여성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나를 위해 쓰는 글이 있다면, 그것은 계속 쓰기 위해 완성해야만 하는 오늘의 하루일지도 모릅니다. 쓰디쓴 고통의 너머로 나아가려 마음을 쓰는 일에 나를 쓰는 것이 하루를 사랑하려는 나의 굳은 의지가 될 수 있게 말이에요. 그러니 절망에서 벗어나 매일이 새로운 우리의 글을 발견할 수 있길.
소설집 『쓰게 될 것』의 작가의 말에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쓰디쓴 삶이라도 이야기로 써서 고통 너머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마음을 쓰는 일에 나를 쓰는 것. 그것이 나의 사랑이라고 아직 믿고 있어요.’
매일 쓰고 있다. 나에게 쓴다는 건 산다는 것. 쓰기의 기원은 언제 어디에 있을까. 한글로 내 마음을 처음 옮겨 적은 그때가 궁금하다. 한글을 막 익혔던 여덟 살의 어느 날일까? 없는 기억이 그립다. 겪었지만 잊었으므로 상상을 더하는 일. 나의 소설 쓰기와 닮은 일.
기원은 잊었으나 어떤 처음은 기억한다. 2010년 여름, 첫 책이자 첫 장편소설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출간했다. 스스로 ‘소설가’라는 정체성도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고 쓰는 일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때였다. 다음 책을 낼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을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때 나는 습관처럼 비관했고 너무 쉽게 부정했다. 행운을 실수처럼 만들려고 애썼다. 왜 그랬는지 이젠 안다. 기뻤기 때문이다. 기쁨에 따르는 책임이 두려워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책임이란 다음 글을 잘 쓰는 것. 실망시키지 않는 것. 그럴 자신이 없어서 나는 물러서고 외면하는 데 힘을 썼다.
2013년 가을, 첫 소설집 『팽이』를 출간했다. 당시 내 상황은 여러모로 곤란했다. 전업작가로 살면서 곤궁함에 빠져 있었고 대인관계도 썩 좋지 않았다. ‘소설가’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없었다. 모퉁이에 몰렸을 때 첫 소설집이 나왔다. 역시,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약속을 지켰으니 다음 약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머무르거나 돌아볼 여유 없이 계속 써야 했다. 그때 나는 나를 소모하듯 살았다. 어서 써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쓴 책이 쌓여갔고 사람들은 질문했다. 왜 소설을 씁니까? 소설을 쓰면 뭐가 좋습니까? 그러게, 나는 어쩌다 쓰는 사람이 되었지? 소설을 써서 좋은 점은 한여름의 무성한 나뭇잎처럼 많았다. 좋지 않은 점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슬쩍 떠오르려고 하면 재빨리 그것을 장점으로 바꿔버렸다. 그렇다. ‘소설을 사랑한다’고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략 2020년 즈음이었다. 나를 ‘소설가’라고 자연스럽게 소개하기까지 십여 년 걸린 셈이다.
얼마 전 ‘첫 산문집’을 출간했다. ‘첫’이란 기회는 다시없으리라고 짐작했는데, 나에게는 ‘산문’이라는 새로운 문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이제는 ‘첫’이 지니는 의미를 안다. 그 의미를 이번만큼은 잘 채워보고 싶었다. 경험하며 배운 것이 있다. 당장 잘 쓰지 못해도 괜찮다. 다음을 기약하려면 지금 쓰는 글을 일단 마무리해야 한다. 아쉽더라도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계속 쓸 수 있다. 여태 많은 글을 썼지만 같은 글을 쓴 적은 없다. 그러므로 매일 쓰는 글은 처음의 글. 쓰는 동안 실망할 수는 있다. 실망과 절망은 다르다. 어제 실망했어도 오늘 다시 새로운 글을 시작할 수 있다. 이제 내게 중요한 건 잘 쓰는 것보다 계속 쓰는 것. 계속 써야만 잘 쓸 기회도 주어질 테니까.
쓰는 일은 사는 일. 그 둘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 물론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언젠가 더는 쓸 수 없을 때가 올 텐데, 그때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쨌든 그건 미래의 일이니 미래의 내가 책임지겠지. 미래의 내가 현명한 사람이려면 지금의 나를 잘 써야 한다. 마음을 쓰는 일에 나를 쓰는 것. 그것이 나의 사랑이라고 여전히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