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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Feb 03. 2020

나는 어떻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나

데일리 드로잉의 힘


내가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 왜냐면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며 밥 벌어먹고살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 일러스트레이터로 데뷔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처음으로 출판사에서 연락을 받았던 2018년 4월이다. 창작동화제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들을 책으로 엮는데 거기에 들어갈 삽화를 그려달라는 의뢰였다. 원래 어린이 동화 일러스트 일을 가장 하고 싶었던 터라 너무 기뻐서 입이 찢어질뻔했던 기억이 난다. 계약서를 쓰고 원고를 받아 그림을 그리니 정말 프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종종 일러스트레이터 커뮤니티에서 들었던 얼토당토 안 한 금액을 제시받지도 않았고 '갑질'도 없었고 무리한 수정도 요구받지 않았다. 쾌적한(?) 시작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세상에!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림을 올리지 마자 의뢰가 들어왔다는 존잘님들도 간혹 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프로로 데뷔하기까지 수개월부터 수년이 걸린다. 나 또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 돈을 투자했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데뷔할 수 있었다.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굉장히 많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 있는지 찾아봐도 학원을 다녀야 한다거나 대학에서 전공을 해야 한다는 등의 정보가 대부분이었고, 그것만이 방법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교육기관을 거치지 않고 데뷔하는 건 타고난 재능이 탁월한 사람들한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겼다. 프리랜서나 일러스트레이터 관련 서적들을 봐도 어떻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은 아주 작은 비중만 차지하고 대부분 프로로 데뷔 후의 커리어를 다룬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정보들이 영감을 주기도 하고 어느 정도 도움은 되었지만 당장 내가 써먹어볼 건 얼마 없어 '나중에 다시 봐야지'하고 덮은 책들이 많았다. 도대체 일러스트레이터는 어떻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뿌듯하고 큰 성취감이 든다. 유명하고 떼돈 벌어서 "성공"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지금 내 위치에서 또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고 믿는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아직 한창 달리고 있는 중이고 이 여정이 어떤 이들에겐 조금이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이 글을 쓴다. 



일러스트레이터 되기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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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드로잉

나의 전직은 그래픽 디자이너다. 대학에서도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도 회사에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취업해 광고, 편집, 패키지 등등 다양한 디자인 관련 일을 했다. 그렇게 3년을 직장인으로 일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직장을 관두게 되었고 집에서 칩거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집에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던 그 당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무작정 흘려보내긴 너무 우울해서 혼자서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데일리 드로잉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100일 동안 뭐라도 그려서 인스타그램에 그냥 매일매일 업로드하는 것이다. 남한테 보여주거나 인정받을 목적도 아니었고 집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엔 남들 열심히 일할 때 뒤쳐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게 싫어서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고자, 아무런 기대 없이 순수한 자기만족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데일리 드로잉 프로젝트의 DAY 1 그림

Day 1. 책꽂이에 꽂혀 있던 수년 전에 반 정도 쓰다만 싸구려 노트를 꺼냈다. 종이는 엄청 얇아서 볼펜으로 쓰면 뒷면에 다 비칠 정도다. 뭘 그릴지 몰라 막무가내로 그냥 검은 펜을 움켜쥐고 꽃을 그렸다. 무슨 꽃인지도 모른다. 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꽃을 꼭 그려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핸드폰으로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려고 만들었다가 3년 정도 방치해놓았던, 팔로워도 그 당시 열 명 조금 넘는 아무도 찾지 않던 인스타그램 계정에 업로드했다. 그렇게 데일리 드로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어차피 봐주는 사람도 없을 건데 중간에 포기하게 되더라도 솔직히 상관없었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Day 2 때는 붉은 장미를 그려봤다. 핀터레스트에서 장미를 검색해서 그나마 따라 그려보기 쉬울 것 같은 사진을 골라 보고 그렸다. 그렇게 또 사진을 찍어서 업로드했다. 한 삼일을 검은 펜과 사인펜으로 긁적이며 그리다 보니 다른 그림 재료들이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10년도 더 된 수채화 팔레트를 꺼내 고등학교 때 이후론 해보지 않았던 수채화를 다시 시도해 보았고, 지루했던 입시미술 수채화와는 달리 너무 재미있었다. DAY 10 쯤부터는 본격적으로 데일리 드로잉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뜨면 오늘은 뭘 그려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했고 2~4시간 동안 그림을 그려 찍어 올릴 때마다 큰 성취감을 느꼈다.  

왼쪽부터 DAY 6, DAY 7, DAY 22,


왼쪽부터 DAY 47, DAY 96, DAY 144

프로젝트의 목표는 100퍼센트 즐거움과 자기만족이었기 때문에 그날그날 그리고 싶은걸 그렸다. 처음엔 꽃이나 디저트 같은 사물들을 아무 생각 없이 그리다가 예전에 순정만화를 그리는 걸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예쁘고 귀여운 여자아이들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순수하고 행복한, 어린아이를 소재로 한 판타지, 동화 같은 느낌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발견했다. 매일 그림을 그려보기 전까진 단 한 번도 동화 같은 그림을 좋아해 본 적도 없었고 동화 일러스트엔 관심도 없었고 수채화로 그림 그리는 게 즐거울 거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3 입시 미술 할 때 수채화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뒤에서 너무 못한다고 비웃은 적이 있었다ㅠ). 하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 자신이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해보게 되었고 혼자서 다양한 그림 그리기를 시도해보고 실험도 해보며 서서히 나는 뭘 그리고 싶은 사람인지,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를 알게 되었다. 그림을 통해 자아성찰을 한 것이다!


데일리 드로잉 팁

1.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매일매일 그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2. 싸구려 스케치북에 그리자. 비싼 스케치북에 그리면 완벽하게 그려야 될 거 같은 압박을 받아서 자유롭게 그리기가 힘들다.   

3. 최소 한 달 동안은 해보자. 

4. 혼자 하는 거 같아 외로우면 SNS에 드로잉 챌린지들을 검색해서 사람들과 같이 해보자. (예: 매년 10월에 열리는 Inktober라는 드로잉 챌린지에 참여하기!) 

5. 뭘 그릴지 몰라 막막할 때를 대비해서 그릴 주제들을 미리 정해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 어렸을 때 기억, 갖고 싶은 물건, 반려동물, 지인 얼굴, 먹고 싶은 음식 등)


그렇게 100일 동안 매일매일 그림을 그려 인스타그램에 올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남들이 봐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내 그림을 보고 찾아와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처음 시작했을 때 10명 남짓했던 팔로워가 점점 늘더니 1000명이 넘어갔고 매일 예쁜 그림을 올려줘서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매일 댓글을 달아주는 팬도 생겼다. 포스터나 프린트를 사고 싶다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 그림을 사람들이 다른 sns에 공유하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호주에 있는 어떤 어린이 서점에서 내 그림을 사고 싶다는 문의가 들어왔다. 100번째 그림을 올렸을 때의 성취감은 정말 말할 수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았던 시간이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은 프로젝트를 혼자 해냈고 그걸 봐주고 좋아해 주고, 심지어 사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엄청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는 100일 동안만 하려고 했었는데 '한번 어떻게 되나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계속해보자'라는 심정으로 DAY 101, DAY 102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렇게 200번째 그림을 그릴 때 즈음, 취미가 아닌 일로써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학교 미술시간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준비물 챙겨가는 게 너무 귀찮았다.) 스케치북이나 공책에 낙서처럼 그리곤 했지만 진지하게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었다. 진지하게 그림 그릴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림으로 먹고 살 생각은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이랬던 내가 이제 그림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걸 현실화시키기로 결심했다.


다음 화에는 본격적인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던 여정에 대해서 포스팅할 테니 stay tuned! :)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eunji.illustration/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EunjiJung

샵: https://etsy.com/ca/shop/EunjiJung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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