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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지 Jan 31. 2023

#1 배경에 속한 사람

2016년 볕이 아주 뜨거웠던 여름, 한 달 동안 충청남도 보령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아티스트 레시던시를 하게 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장소에서의 시간은 도시에서는 맛보지 못한 새로움을 주었다. 매일 시시 각각 변화하는 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미술관 지대에는 돌조각 공원과 함께 작은 규모의 동물 사육장이 있어 낮에는 늘 관광객으로 붐볐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큐레이터와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작가만이 그곳에 머물렀다. 밤에는 도시와는 대비되는 어둠이, 산에서는 야생 동물의 묘한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미술관에 남아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은, 나를 포함한 한국인 작가 두 명과 큐레이터 그리고  폴란드에서 온 두 명의 조각가였다.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은 뒤 미술관 로비에서 맥주나 차를 한 잔씩 마시곤 했다. 한국어, 영어, 폴란드어가 뒤섞였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탓에 때때로 얼굴이 붉어지고 어쩔 줄 몰라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그럭저럭 대화는 원활하게 이어졌다.

나는 주로 아침 8시에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씻고 로비로 내려가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먹고 산책을 했다. 밤 사이 맺힌 이슬에 촉촉해진 푸른 잔디 위를 걸으며 파란 산을 가만히 보곤 했다. 연못에 사는 오리떼들에게 살며시 다가가 말을 걸기도 하고 인근 사육장의 동물들을 보러 가기도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토끼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왜소하고 작은 남자를 보았다. 그는 토끼에게 당근을 주고 있었다. 그의 인상은 뭐랄까.., 흐리멍텅했다. 마치 배경에 속한 사람처럼. 희미한 존재의 사람이었다. 나는 멀리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토끼들에게 나지막이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다 함께 모인 식사자리에서 큐레이터로부터 옛날이야기 하나를 듣게 되었다. 예전에 이 지역은 광산촌이었는데(뒷산에 광산 터널이 아직 남아있다) 많은 가구가 살지 않아 서로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여자아이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한다. 아이는 현재는 미술관 내부 공원으로 바뀐 이 길을 매일 지나다녔었는데 누군가에게 곧잘 인사를 했단다. 그리고 “그 아저씨야"라고 말하곤 했다고. 하지만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더운 여름밤에 제법 잘 어울리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구수함에 “뭐 더 없어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사실 오싹했다. 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한 사람이 떠올랐는데, 아침 산책길에 본 토끼 사육장 앞에서 본 그 왜소한 남자였다. 만약 그가 이야기 속의 남자라면 혹시 아직도 이곳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일까?

다음 날, 나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작업실로 올라가 밑작업을 하고 오후 2시쯤 뻣뻣해진 몸을 풀어주고자 마을로 산책을 나갔다. 푸릇푸릇한 밭과 한옥집들, 마을에 하나쯤 있는 소 외양간. 어디에선가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길 건너에는 작은 초등학교도 있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그때, 또다시 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미술관 진입로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각이 너무 거대해서인지 그가 더욱 작게 느껴졌다. 그는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듯 보였는데 곧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고는 공원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나는 멀찍이에서 그를 따라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날아가는 듯 '스르륵'했다. 분명 걷고 있으나 걷는다는 느낌이 아닌 '스르륵'함이었다.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는 공원의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 길의 끝에는 과거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광산 터널이 있었다. 터널 내부는 아주 캄캄하고 서늘했다. 그는 터널 앞에 서서 한참을 동굴 안을 바라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그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나의 뜨거운 몸을 식혀 주었다. 긴장된 근육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아침 식사 후 산책을 하고 작업실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조금 지루해지면 다시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공원에 있는 오리, 양, 토끼들을 보러 갔다. 그렇게 한 달의 레시던시 기간이 끝나고 대구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동굴 밖으로 나와 또다시 사람들 틈 속에서 끝없이 걸어 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영영 다른 세계로 가버린 것일까? 나는 그를 그려본다. 배경처럼 희미한 사람에 대해, 스르륵 걷는 자에 대해, 사람들 속에 있었으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에 대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브런치 주간 연재 | 화요일의 초단편 소설 

브런치를 통해 일주일에 한 편씩 초단편 소설과 함께 그림을 발행하는 개인 프로젝트입니다. 

매주 화요일 마다 한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목차

/ 배경에 속한 사람

/ 하루종일 잠만 자는 사람의 이야기

/ 여름 토스트

/ 붉은 꽃 

/ 두더지 

/ 고양이 

*발행 순서는 상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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