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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조화 Nov 23. 2022

한국 문화재는 왜 이렇게 초라하지?

뿌리깊은 꽃은 어디로 갔는가


뉴욕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때였다. 미술사에 관심 있던 나는 주말에 기회가 될 때마다 맨해튼에 있는 현대미술관, 일명 모마(MOMA)에 자주 놀러 갔다. 뉴욕주립대 학생증을 내면 20불이 넘는 입장료가 무료였기 때문에 일부로라도 자주 갔었는데, 이곳에 한국 작가의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찾으려는 노력도 안 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화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비롯한 많은 유명 그림들을 보고 황홀해하기 바빴다. 이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있는, 센트럴파크와 붙어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인상주의 섹션만 찾아다녔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이 거대한 미술관에는 그래도 크기가 커서인지 '한국' 파트가 존재했다. 세계 굴지의 미술관에서 만나는 한국문화재라니! 내심 반가웠지만, 작고 조용했던 그 전시실에서 달처럼 맹숭맹숭한 색을 가진 도자기들을 보고 나는 참 부끄러운 생각을 했었다.


우리 한국 문화재는 왜 이렇게 초라하지?


강렬한 색들이 춤을 추는 고흐의 해바라기와 밀밭에 빠져있던 나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단정해 보이는 우리의 문화재들이 어딘가 심심하다고 느꼈다. 뭔가 덜 완성된 느낌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러워졌다. 사대주의의 개념에 대해 모를 리 없던 대학생은 이렇게 남몰래 느꼈던 솔직한 감상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조선의 <달항아리>, 출처: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이젠 30대가 되어 깔끔한 아메리카노의 맛도 알게 되었고 수수한 달항아리 또한 강렬한 색채들에 뒤처지지 않는 고고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뉴욕의 작은 한국미술관에서 느꼈던 감정은 진심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색채의 마술사 샤갈의 작품들이나 인상주의 화풍들에 빠져있었기에, 그 작은 한국실에 있던 한정된 작품들은 내 색채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주지 못했었다. 각 시대와 문예사조들을 대표하는 엄청난 문화유산들로 가득 차 있던 곳 한편에 낑긴 한정된 공간 안에 한국의 모든 것을 담을 순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화조도나 책거리도 같은 형형색색 민화까지 함께 전시되어 있었더라면, 내가 그토록 수치스러운 감정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한국의 미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곳에 있던 문화재의 양은 그 모든 한국의 아름다움을 담아내기엔 절대적으로 적었다.


다양한 색이 담긴 우리의 민화 <책거리도>, 출처: e뮤지엄


그때의 작은 한국실처럼, 당장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 놓치게 되는 아름다움들이 있다. '한국 꽃꽂이'가 그랬다. 꽃집을 하는 친구 덕에 아름다운 꽃다발과 꽃꽂이 작품들을 소셜미디어에서 그렇게 많이 봐왔는데도, 한국 꽃꽂이에 대한 사진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요즘은 확실히 유럽풍 꽃꽂이가 유행이기도 하고, 프랑스나 영국에서 유학한 플로리스트분들도 많은 것 같았다. 나는 꽃에 대해 공부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우연히 동양 꽃꽂이 영상을 접했다. 보이지 않아서 몰랐던, 내 취향에 쏙 맞는 그 아름다움에 난 그대로 쭉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궁중채화'도 그러했다. 한국의 꽃 문화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전혀 모르고 있던 조선시대 왕실의 '조화' 장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에는 궁중 연회에 쓰일 장식품으로 '생화'를 꺾어 사용하는 대신, 비단이나 종이 등으로 '조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를 '궁중채화'라고 한다. 조선왕실의궤에서는 이런 궁중 조화를 제작하는 장인을 '채화장' 또는 '화장'으로 기록하였다.


<홍벽도화준>,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홍도화준>,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나는 이런 한국 전통 꽃 문화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다. 아니, 들은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궁중채화는 황수로 장인의 오랜 연구 끝에 2013년에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식으로 한국의 문화재로 인정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황 장인은 약 200억 원의 사재를 털어 경남 양산에 한국 궁중 꽃 박물관을 지었고, 이 박물관은 비교적 최근인 2019년에 개관하였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가 있었고, 민족말살정책 아래 우리의 문화는 쉽게 보존될 수 없었다. 황수로 장인이 궁중채화를 연구하게 된 계기 역시 보존되지 못한 우리의 꽃 문화를 되찾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의 외조부는 고종 황제 때 관직을 지냈고, 간혹 황제가 하사한 잠화(머리에 꽂는 꽃장식)를 집으로 가져왔다고 했다. 이를 보고 자란 황 궁중채화장은 일본 유학시절, 꽃꽂이 문화는 일본 고유의 전통문화라는 일본인들의 말에 반박했지만 그 증거가 없어 매우 난처했다고 한다. 시대적 제약 때문에 남아있는 사료가 많이 없었던 탓이다. 


궁중 연회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채화 장식들을 볼 수 있는 <정해년의 궁중잔치>, 출처: e뮤지엄


한국 궁중 꽃 박물관이 개관한 지 이제 막 3년이 되었다. 그곳에는 그동안 황수로 화장님의 연구를 통해 훌륭하게 재연된 채화 장식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시중에는 궁중 채화의 역사와 제작과정을 다룬 책을 비롯하여 화장님의 꽃 같은 인생을 담은 책 등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자꾸 한국 꽃꽂이를 찾아보는 나를 사로잡기 위한 알고리즘 때문인지, 소셜미디어에 침봉을 이용한 동양 꽃꽂이 사진 게시물들이 점점 많아지는 듯하다. 이제 막 한국의 전통 꽃꽂이 문화가 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시대적 제약으로 원 없이 꽃 피우기 힘들던 우리의 전통 꽃 문화를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이 거대한 인터넷 바다에서, 나도 한국의 꽃 문화에 대한 글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 누군가는 여백의 미가 있는 한국식 작품을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채도와 명도가 모두 높은 강렬한 빨간 꽃이 촌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누군가에게 닿았으면 한다. 

나처럼 '동양 꽃꽂이' 작품을 접해 보지 못해서,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해서 사랑에 빠지지 못했던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나의 글을 하나씩 펼쳐놓아보려고 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한국관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다양한 문화재들을 담고 있다면, 다양한 취향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앗, 실제로 우리의 문화재를 반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미'를 담은 글을 꾸준히 올려서 한 명이라도 그 아름다움을 더 알게 되는 것이 이 매거진의 목표이다. 이게 바로 '뿌리깊은 꽃' 매거진을 시작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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