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기린으로부터
누군가가 그랬다. 이제 스치듯 노란색만 보이면 기린인 것 같아서 내가 생각난다고. 이제껏 살면서 들었던 '기린'이라는 단어의 빈도보다, 나를 알게 된 후 들은 기린이라는 단어의 빈도가 더 잦다고. 나는 누군가에게 나 대신 '기린'이라는 단어로 기억될 만큼 기린을 사랑한다. 기린이라는 동물뿐만 아니라 기린이 들어간 모든 이미지를 사랑한다. 이쯤 되면 기린은 내 정체성의 일부가 아닐까?
사람들은 기린을 왜 좋아하냐고 자주 묻는다. 계기는 좀 뜬금없다. 육사 생도 시절 매 훈련 전마다 방탄모에 나뭇가지를 빼곡히 꽂는 위장을 했어야만 했다. 한여름에 하는 훈련이다 보니 다들 지친 상태라 동기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향해 달려가 손에 닿는 대로 꺾어서 서둘러 방탄모에 꽂아버리곤 했다. 나는 전교생 중에 키가 제일 작았는데, 그 순간만큼은 키가 작다는 사실이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내가 손이 닿는 모든 곳에는 아무런 나뭇가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절망적인 그 순간 정말 난데없이 '기린처럼 키가 컸다면'이라는 탄식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내가 기린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나? 훈련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켜서 기린을 검색했다. 그리고 그 자태에 감탄했다. 그 순간, 기린과 나의 운명의 연결고리가 탄생했다.
휴대폰 속의 기린은 약육강식의 밀림의 세계에서도 유유하게, 여유롭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기린은 내가 가지지 못한 독보적인 존재감도 가지고 있었다. 넓고 푸른 초원 어디에서든 독보적인 색감과 형태로 다른 동물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기린. 모든 것을 똑같이 해내기를 바랐던 환경 속에 있던 그때의 나는 독보적인 기린의 존재감이 많이 부러웠던 것 같다. 나는 단숨에 기린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나는 기린이 들어간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을 수 없는 대상이면 사진을 찍어서 간직했다. 기분이 좋아지면 하트 무늬가 짙어진다는 스토리를 담아 기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기린은 자연스럽게 내 삶에 스며들었고, 나는 기린이라는 단어와 함께 기억되는 사람으로 변했다.
어느덧 기린과의 만남으로부터 14년이 지났다. 어떤 것도 오랫동안 좋아하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나는 신기하게도 여전히 기린을 좋아한다. 집, 책상, 가방 속, 프로필 사진까지 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는 이제 웬만하면 기린이 있다. 이제는 기린 그 자체보다 이것에 담긴 나만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어디서 발견했는지, 누구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인지, 어떤 의미가 담겨 나에게 오게 되었는지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린을 발견했을 때 참 많이 기쁘다. 그 기린을 조심히 데려와 내 생활에 놓아두면 볼 때마다 또 많이 기쁘다. 이런 기쁨이 모여 나를 매일 같이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자연스럽게 이 기쁨과 행복을 주변에 전하고 싶어졌다. 꼭 기린이 아니어도 좋지만 모두의 삶에 기쁨의 결정체 하나를 품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 나의 기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