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 지우개 도장

세상에 없길래 그냥 만들어버렸다.

by 은조미

기린 인형이나 스티커들은 상대적으로 찾기가 쉬운데 정말 어려운 아이템이 바로 ‘도장’이다. 다이어리 꾸미기용 스탬프들이 모여있는 곳들을 꽤나 가보았는데, 내가 원하는 기린이 없었다. 기린의 사실적인 모습을 담은 도장이 아니라, 뭔가 캐릭터 같은데 굵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찍었을 때 선명한 모습이 담겨야 했다. 그런데 이런 기린 도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만들면 되는 거잖아?’라는 생각이 스쳤다. 한때 즐겁게 했었던 지우개 도장 만들기 능력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지우개와 커터칼만 있으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지우개 도장. 갑자기 고3 때 알게 된 지우개 도장 파기 덕분에 수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꽤나 인기 있는 공예 취미였는데 한국에서는 생소하다 보니 인터넷을 뒤져가며 나름의 기술을 연마하기도 했었다.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러 가서도 취미와 특기를 적어서 내라는 말에 당당하게 ‘지우개 도장 파기’를 적어내었다. 훈련을 마친 뒤 친해진 선배에게 들으니 생각지도 못한 것을 적어내어 선배들이 돌려가며 보면서 당황해했었다고. 하지만 정말 진심이었던 나는 1학년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지우개 도장을 만들었다. 학교에 있는 조각상을 따라 만든다거나 생일을 맞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름을 파서 전해주기도 하며 꽤 쏠쏠하게 활용했던 취미였다.


하나의 취미에 정착하지 못하는 천성 탓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지우개 도장. 역시 세상에 배워둬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도안을 그린 다음, 거의 10년 만에 커터칼을 제대로 쥐었다. 직선으로 칼을 세워 테두리를 따라 살금살금 자국을 내준다. 다시 칼을 비스듬히 눕혀서 테두리 자국 옆을 쓱 긁어 주변을 도려내준다. 어느새 우뚝 선 기린 모양이 금방 나왔다. 좋아! 점점 기린이 드러나고 있어.


이제 디테일을 더할 차례. 몸 군데군데의 얼룩을 표현해 주고 마지막으로 앙증맞은 눈을 만들기 위해 마지막 남은 집중력을 모았다. 까딱해서 힘 조절을 잘못하면 지금까지 한 작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기에 서두르기보다는 천천히 조금씩 주변을 깎아간다. 드디어 지우개 속에 숨어있던 기린을 모두 꺼내주었다!!



잉크를 조심스레 묻혀서 찍어보니 내가 원하던 바로 그 기린 도장이었다! 내가 원하던 기린을 갖게 되었다는 만족감과 스스로 만들었다는 성취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시간을 들이고 노력하는 일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와 정확히 반대의 행동은 묘한 해방감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정말 좋아서, 마음이 동해서 무용한 일에 애써보는 것만큼 제대로 된 에너지 충전이 있을까? 또 이렇게 기린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