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닌 안토니(Janine Antoni)의 <갉다(Gnaw)>
'에이스'라는 비스킷에는 '쉼표'라는 스티커가 있다.
돌멩이도 소화시키던 학창 시절, 이 '쉼표' 스티커가 무색할 정도로 나는 항상 에이스 한 통을 다 비워먹었다. 한 번은 칼로리에 놀라 '쉼표' 스티커를 사용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한 통을 다 먹기 전까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 문제 풀 때마다 넣어둔 과자가 눅눅해질까 봐 걱정됐고, 딱 한 개만 꺼내 먹을까 하며 수십 번 갈등했다. 결국 무지막지한 식욕은 한 통에 640kcal이라는 사실도, 입천장이 까지는 아픔도 잊은 채, 모든 것을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그때는 정말 많이 먹었다. 과자도 그리고 밥도. 그래도 그때의 식욕은 건강했다. 신체 성장과 함께 동반되는 자연스러운 욕구였기 때문이다. 그때 먹었던 음식들은 나의 피와 살이 되어 건강한 신체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건강했던 나의 식욕은 다이어트로 점차 왜곡되기 시작했다. 왜곡된 식욕은 걷잡을 수 없게 폭주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더욱 불타오른 것처럼, 음식에 대한 나의 사랑도 다이어트로 인해 거부당하자 더욱 불타올랐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음식에 대해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다가 결국 폭발하게 되었다. 평소에 먹고 싶었던 빵을 한가득 사 와서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미친 듯이 빵을 입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문득 살이 찔 거라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 순간 씹고 있던 빵을 뱉기 시작했다.
씹고, 뱉고, 씹고, 뱉고
먹고는 싶지만 살이 찌는 것이 두려워 씹고 뱉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뱉어진 빵들을 보고 이러다가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더 이상 극단적인 식이조절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다이어트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이는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현대인이 다이어트라는 굴레 속에 고통받고, 비정상적인 식탐으로 몸을 학대하고 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재닌 안토니는 오직 커다란 두 덩어리로 이 모든 것을 표현했다.
사진 출처 : http://www.janineantoni.net/gnaw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 마치 채석장에 던져진 바위 덩어리처럼 생긴 이 조각은 초콜릿과 돼지기름 덩어리이다. 작가는 600파운드(약 272kg)의 초콜릿 큐브와 돼지기름덩어리를 가지고 조각을 했다. 자신의 '이빨'을 가지고 말이다. 초콜릿과 돼지기름으로 된 거대하고 묵직한 덩어리에는 아직도 작가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작품을 보자마자 식욕이 폭발해 걸신들린 듯 빵을 먹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 사슴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먹잇감을 보자마자 달려가 마구잡이로 찢어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과 비슷했고, 그것은 재닌 안토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직접 거대한 덩어리를 갉아먹는 퍼포먼스를 했다. 초콜릿과 기름 덩어리를 끌어안고 탐욕스럽게 갉아먹는 장면은 역겨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이 작업을 끝낸 작가의 입엔 짐승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처럼, 인간의 탐욕을 대신하는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 탐욕은 있는 그대로 당과 지방에 대한 중독일 수도, 날씬함에 대한 욕망이 빚어낸 비정상적인 식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악순환 속에 함께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풍부한 물자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음식 중독에 빠져있다. 필요 이상의 당과 지방을 탐하며 온갖 성인병에 시달린다. 그리고는 이렇게 지나친 섭취로 인해 불어난 몸을 또다시 다이어트라는 이름으로 학대한다. 온갖 먹방과 광고는 우리의 식욕을 응원하면서도 뚱뚱한 몸은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가 계속 먹기 원하는 동시에, 날씬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맛집을 다니며 미식을 즐기는 동시에, 꾸준히 운동을 하며 아름다운 몸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왕성해진 식욕에 몸은 끝도 없이 불어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극단적인 식이조절에 돌입하지만 항상 그렇듯 식이조절은 요원하고 결국 지방흡입이라는 의학의 힘을 빌리게 된다. 먹는 데 돈 쓰고, 빼는 데 돈 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요요처럼 반복된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린 병들기 시작한다.
마치 재닌 안토니가 씹고 뱉어놓은 초콜릿과 지방 덩어리처럼 우린 망가진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이자 근원적인 욕구인 식욕은 자본화되어 '식이장애'라는 이름으로 반대로 우리 삶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언론이나 드라마, 인터넷, 영화, SNS 서비스 등 어디에서도 멋진 몸까지 가기 위한 그 처절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다듬어진 몸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 과정 속에서 처절하게 갉아먹힌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닌 안토니의 고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참혹한 덩어리를 지나 옆 방으로 가면 세련되게 포장된 욕망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하트 모양의 초콜릿 상자와 새빨간 립스틱이 진열되어 있다. 갉아먹히고 씹고 뱉어져 망가지는 것을 봤지만, 또 우리의 욕망은 자본에 의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또다시 이용당한다.
씹다 버려진 초콜릿은 남녀 간의 사랑을 확인하며 주고받는 선물상자로, 씹다 버려진 기름 덩어리는 매력적인 빨간 립스틱으로 재생산된다.
그런데 어쩌면 이 전시는 거꾸로 보아도 좋을 거 같다. 아름답고 멋진 초콜릿 상자와 립스틱의 원래 모습은 자본에 의해 추악하게 이용당한 우리의 욕망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