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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주 May 13. 2018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

아재 개그와 르네 마그리트

Q: 왕이 궁에 들어가기 싫을 때 하는 말은?

A: 궁시렁 궁시렁 


         

아이들은 말놀이를 좋아한다.     

말장난, 언어유희, 흔히 아재 개그라고 불리는 말놀이에 아이들은 껌벅 죽는다. 

어른들 역시 겉으론 아재 개그가 유치하다며 비웃지만, 뒤돌아서 피식피식 했던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이, 말이 되는 순간. 말과 사물의 관계는 비틀어지고, 이러한 아이러니에서 유희는 시작된다.  

      

이러한 말놀이는 이제 막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에게 자주 보인다. 

말을 배운다는 것은 세상을 언어라는 틀 안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갓난아이가 처음 접하는 세상은 혼돈이다. 

무언가가 있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모두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다. 그런 세상이 '언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하나씩 구분되기 시작된다.      


“엄마”라는 말을 배우자 엄마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빠”라는 말을 배우자 아빠도 나타난다.     

 

아이들이 세상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자, 세상은 비로소 자신의 말간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일정한 규칙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언어가 쓰이는 맥락을 이해하고 룰을 잘 따라야만 아이들은 성공적으로 언어를 배울 수 있다.           


말놀이는 이러한 규칙, 즉 룰을 깨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제껏 배워왔던 관계는 비틀어진다. 하지만 관계가 비틀어지는 것이, 규칙이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규칙의 탄생이다. 숱한 시간 동안 룰이 단단해진 어른들에게야 이 새로움이 "말도 안 됨", "유치함"이겠지만, 이제 막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신선함이고 새로움이고, 그러므로 즐거움이다.      


이러한 말놀이의 묘미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가가 있다.      

바로 마그리트이다.      



그는 말을 가지고 노는 대신, 이미지를 가지고 논 사람이다. 말놀이가 개념의 익숙함을 깬다면,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익숙함을 깬다.      


말이 쉽지, 막상 말놀이를 직접 만들려면 어려운 것처럼, 이미지의 익숙함을 깨는 것도 역시 쉽지 않다. 

익숙한 것은 너무 익숙해, 익숙하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기어코 그것을 잡아냈고, 그리하여 익숙함을 낯섦으로 바꿔버린다.      


말놀이가 음성 언어인 '말'을 재배치하는 것이라면, 마그리트는 시각 언어인 '그림'을 재배치한다. 그는 낯익은 이미지들(여기에서 '들'이라는 복수형이 중요하다. 낯섦이든 익숙함이든 뭔가 이야기가 되려면 이미지는 둘 이상이어야 한다)을 본래의 위치에서 조금씩 빗겨 놓는다. 그럼으로써 이미지들은 있어야 할 곳에 없고, 없어야 할 곳에는 있게 된다. 재봉틀과 우산이 해부대에서 우연히 만나듯, 그의 그림에서는 낮과 밤이 낯설게 만난다.                          


낮과 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친숙한 것은 없다. 도대체 낮과 밤 이외에, 즉 우리의 하루하루 이외에 무엇이 더 친숙할 수 있을까? 도무지 낯설 수 없는 이 둘을 마그리트는 낯설게 만든다. 이상하게 만든다.      


그런데 낯섦의 재미는 오히려 여기에 있다. 그 비틂이 친숙한 것일수록 충격은 크다. 마치 좀비 영화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의 변화가 가장 공포스럽고, 그러므로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친숙하면 친숙할수록 그것에 대한 낯섦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철석같이 믿어온 애인의 변심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빛의 제국II (The Empire of Light II), 1950년, 캔버스에 오일


<빛의 제국Ⅱ>  또한 그렇다. 

지극히 평범한 이미지들이 놓여있지만, 내용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모순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언가가 있어야 할 곳에 없고, 없어야 할 곳에 있다. 

사실 이것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 하나가 그러하면 다른 하나도 당연히 그러해지게 되는 것인데, 이 그림에서는 있어야 할 밤하늘에 밤하늘이 없고, 없어야 할 낮 하늘(이런 표현도 이상하지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낯섦은 우리를 붙잡는다.      

우린 이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마치 짝짝이로 갈라진 나무젓가락처럼, 이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이러한 낯섦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이러한 낯섦, 이상함은 아이들에게는 신기함이자 즐거운 놀이 소재가 된다. 아이들은 이 그림 하나만 가지고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동화부터 블록버스터급 이야기까지 스케일은 다양하다.                            


매일(Every day), 1966, 캔버스에 오일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낯익은 이미지들을 재배치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를 제시한다.      

이러한 낯선 연결은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겨울비(Golconde),  1953, 캔버스에 오일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도서 1:9~10)     


내가 기독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구절에는 동의한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창의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있던 것들을 다르게 만드는 것, 혹은 다르게 연결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있던 것들을 다르게 연결하는 것이 창의력일지도 모른다. 마치 스마트폰이 핸드폰과 pc를 연결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존의 있는 것들을 다르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다르게 볼 수 있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능력.      


결국 창의력은 시각의 문제이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우리의 단단하게 박제된 시각을 깨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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