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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Apr 01. 2024

콩나물을 키우는 물 한 바가지

“나... 암 이래... 유방암...”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상에...” 나의 목소리도 덩달아 흔들렸다.

“두 달 전에 건강검진 하다 발견 됐어. 초기라 문제없다는 데도 암이라는 게...” 말없이 듣기만 했다.

뭔가 힘 낼 말 한마디 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그때 침묵했던 건 선택이 아니라 내 언어표현의 한계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조바심 났었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무서웠다 안 무서웠다, 기분이 좋았다 안 좋았다 해. 잠도 잘 못 자서 처방약 먹고 좀 자고 있어. 무서운데 용기내고 있어. 사람들한테 위로해 달라고 말도 하고. 혼자 얼마나 울었나 몰라. 지금도 좀 그래. 두 달 동안 업다운의 연속이야. 그즈음에 너한테 전화를 했었던 거야."


한 달여 전 그녀에게서 온 전화를 상황이 안돼 못 받고 지나쳤던 때가 생각났다.

“미안. 그때 늦게라도 전화를 했어야 했네.”

“사람들은 무서워 말고 내려놓으라는데...”

손에 들고 있는 컵도 아니고 어떻게 내려놓는다는 건지 모르겠다. 힘든 감정 후딱 내려놓고 편한 마음 냉큼 집어 올려 상황을 벗어나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워야지. 그녀가 지금 겪고 있는 감정은 전부 당연한 것이다. 어른답게 받아들이라는 말은 안 그래도 아픈데 매질을 하는 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어른이 아이보다 덜 아픈 것은 아니다. 그저 많이 아파봐서 더 오래 더 잘 견디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프다면 아픈 거다. 그녀와 한 시간여 동안 통화한 후 끊을 무렵 내가 말했다.

"너 참 잘 견딘다. 너의 이야기 듣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도움도 청할 줄 알고. 좋은 마음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네가 느끼는 감정 당연한 거니까 너무 징징대는 건 아닌가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물론 내 생각이지만 말이야."

"야! 나 사실 그 말이 듣고 싶었어."

"그래? 그럼 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 내가 눈치가 없어 너무 늦게 말했나 보네."

“아냐. 너랑 통화하니까 마음이 시원해진다. 다음에 또 전화해도 되지?”

“당연하지. 언제든 해. 밤이고 낮이고 다 괜찮아. 망설이지 말고 그냥 해.”


그녀는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지만 나와의 통화는 잠시 동안의 진통제 역할만 할 뿐이다. 무섭고 불안한 감정들과의 내적전쟁이 계속될 것을 알기에 전화를 끊는 내 마음이 산뜻하지가 않았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엄마가 검은 포 덮어 키우던 콩나물이 생각난다. 나는 그녀에게 콩나물시루에 쏟아 주는 물 한 바가지에 불과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부어 달라고 부탁할 줄 아는 그녀의 적극적 노력이 있어서다. 한 번 두 번 부어진 물 한 바가지가 당장은 표 나지 않겠지만 그녀가 잘 견뎌내도록 도울테고, 부쩍 자라난 콩나물처럼 건강하게 자란 그녀의 마음을 보게 되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살다 보면 휘청이게 하는 어려움을 징검다리 건너듯 만난다. 백 미터나 이백미터 앞에서 떨어지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갑자기 발등 위로 뚝 떨어진다. 사는 게 참 만만치가 않다. 나도 그랬고, 여전히 그러고 산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 꿈이길 바라지만 아니다. 아침마다, 잠도 덜 깼는데 어려움은 내 귀에 대고 꿈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현실을 각인시킨다. 허벅지를 백 번 꼬집어봐라 현실이 바뀌나. 내 손에 짝 달라붙은 상황이 똑 떨어질 리 없다. 긍정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국은 인정하게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음순서로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아 알게 된다. 내가 한 바가지의 물이 되듯 나도 물 한 바가지가 필요해 기댈 때가 많다. 우리는 사는 동안 서로에게 시원한 물 한 바가지가 된다. 그건 어쩌면 사랑이라기보다 생존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다 끝내고 지금은 활기차게 자기 일을 하고 있다. 그때의 마음은 캄캄한 밤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만난 것 같이 무서웠다고 했었다. 몰라도 알 것 같아 내 마음도 오그라 들었었다. 이제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 안부를 전한다. 소식이 뜸하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은 행복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중이다. 어려움을 견뎌내니 마음이 단단해졌다고 당차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아 나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전에는 바짝 겁먹었던 일들이 이젠 무섭지가 않단다. 어려움을 견디고 많이 단단해졌다는 그녀의 고백에 나도 진심을 담아 맞고백을 했다. 한 번씩 어려움을 겪고 지나면 마음에 실근육 같은 게 생긴다. 그녀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한 고비를 마침내 넘겼고 한동안 그러지 못한 여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나도 한 시름 놓았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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