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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Mar 22. 2024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여보세요?”

"어여 밥 먹으러 와. 김치 지졌어.”

“진짜요?”

“진짜지 그람. 그짓말이까."

“네. 금방 가요.”     


음식 잘하시는 최 권사님이 김치를 지지셨단다. 고기 한 점 없이 묵은 배추김치, 총각김치만 푹 지진 것이다. 오늘의 밥그릇은 국수 대접일 게 분명하다. 설렘을 빵빵하게 품어서 그런가 둥둥 떠 다니는 풍선이 된 기분이다. “어여 와.”하시는 권사님 앞에 벌써 밥상이 차려져 있다. 김치찜이 담긴 큰 냄비가 나 보란 듯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해 존재감이 장난 아니다. 다른 반찬이 몇 가지 더 있는데 그 또한 내 입맛에 안성맞춤이다. 후보 선수 하나 없이 다 주전으로 뛰고 있는 듬직한 밥상이다. 묵은 김치찜은 반드시 양손 엄지와 검지로 길게 찢어야 한다. 싹둑싹둑 자르는 건 김치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암~ 아니고 말고. 밥 한 숟가락 크게 뜨고 푹 익은 묵은지 길게 찢어 돌돌 말아 올려 입이 미어지게 넣으면 끝장난다. 꿀꺽 삼키는 순간 무엇인가 빠르게 달려 모세혈관까지 가닿는 느낌이다. 그건 아마도 행복감일 것이다.

“어우 맛있어."

"음~맛있다."

"진짜 맛있네."

"너~무 맛있다.”

"아이고 어지간히 맛있다고 그래쌌네. 아니, 숟가락이 입에 들어갈 때마다 맛있다고 그랴. 시끄럽게. 또 해줄 테니께 조용히 밥이나 먹어.”

“제가요? 하! 하! 하! 진짜 그러네.”

밥 한 끼, 밥 상은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밥 한 끼 밥상을 말로 하면 어린 시절 엄마가 부엌에서 들고 오던 양은 밥상이 생각나 벌써 맛있기 때문이다. 밥상 위에서 숟가락 젓가락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건 식구들끼리 자기들만의 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소리다.

 

 최 권사님은 둘째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 주방 담당 선생님이셨다. 여유롭게 곁을 내준 덕분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시면 밥 먹으러 오라는 연락을 하셨는데 아마도 맛있게 먹는 내가 생각 나서였을 것이지만 어쩌면 김치찜을 해달라고 보채서 그러셨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먹은 권사님의 음식은 비빔국수와 잔치국수였다. 권사님의 손녀들이 할머니집에 비빔국수 먹으러 간다고 해 졸졸 따라 가 자식처럼 끼어 앉아 있다가 큰 대접에 담긴 빨간 비빔국수와 멸치육수 진한 잔치국수를 호들갑 떨며 싹 비웠다. 역시 맛있었고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나 있었다. 아이들이 나 때문에 불편했을 수도 있어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권사님 음식에 대한 나의 욕심이 눈치보다 용감했다.

     

권사님의 집 앞에는 권사님이 앉아 쉬시던 의자가 있었다. 아프기 시작하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날이 늘어갔다. 자주 지나다니던 길이라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만났다.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가 안타까우니 괜히 더 목소리를 높여 인사를 하며 밝게 웃고 너스레도 떨었다. 힘센 목소리로 이런저런 타박을 하시던 분이 기운 없이 겨우 대답만 하시니 재미도 없고 마음만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의자에 앉아 있는 권사님의 얼굴에 스치는 죽음을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죽음을 권사님이 눈치챌까 봐 놀라서 급하게 아무 말이나 했던 것 같다. 권사님의 며느리에게 어머니 혼자 계시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게 전부였다. 그 며칠 후 권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의자에는 권사님 대신 먼지가 내려앉고, 그 빈 의자조차 없어지고 나서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눈빛으로 그 자리를 쓰다듬곤 했다. 이제 권사님은 거기에 없다. 그래도 함께한 추억을 떠 올리면  거기에서 아직  살고  계신 듯 느껴진다.


최권사님의 김치찜이 오래오래 추억하는 깊은 맛이 날 수 있었던 이유는 손맛도 손맛이려니와 잘 익은 한 사람의 깊은 마음이 있어서라고 생각된다. 순도 높은 마음이 담긴 권사님의 음식과 투박하지만 정겨운 말 그릇도 종종 그리워 목소리와 표정을 떠올리곤 한다. 뒷짐 지고 천천히 걷던 뒷모습도 그립다. 조건 없이 받은 그 사랑은 사는 내내 마르지 않는 힘의 샘터가 되었다. ‘나 그런 사랑까지 받아본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웅크렸던 마음이 활짝 펴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난 요리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남에게 밥 해주는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밥 하는 사람의 마음과 수고에 고마운 마음이 상당하다. 내가 뭐라고 이런 대접을 받나 한다. 누군가 내게 밥을 해 줬다면 그건 어쩌면 사랑한다는 고백일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쓱 건네며 넣어둬 별겨 아니야 하는 것 같다. 사랑은 징검다리 건너듯 사람사이를 오가며 매일매일 좋은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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