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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Mar 15. 2024

봄에 관한 이유 있는 수다

흙이 부드러워졌다. 내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렸다. 경칩이 지나고 밭의 흙을 밟았을 때 그렇게 느꼈다. 두꺼운 신발을 뚫고 몸 전체로 재빠르게 내달리는 봄의 아이들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옆구리에 저수지를 끼고 앉은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거기에는 맨발 걷기 길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있다. 머리칼이 희고 어깨가 굽은 어떤 사람이 맨발 걷기 길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게 보였다. 그 손길이 있어 발바닥에 걸리는 것 없이 맨발 걷기를 할 수 있는 거였다.  좋은 마음이 세상으로 나오면 사랑이란 이름을 얻는다.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인 사랑이 된다. 소나무에 기댄 키 큰 대빗자루가 믿음직스럽다.


신을 벗고 땅을 디뎠을 때 바닥이 차가워서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괜히 시작했나 잠깐 후회했지만 발뒤꿈치부터 발가락까지 꾹꾹 눌러 천천히 걷다 보니 발 시린 것도 가시고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잡다한 생각은 꼼짝 못 하게 묶고 오롯이 발바닥의 촉감에만 집중했다.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 사이에 끼어든 촉촉한 흙이 하도 좋아 내려다보며 걷는 동안 쨍하게 웃던 어린 시절의 내가 되었다. 여름날 비가 내리면 신발 벗고 수 킬로의 거리를 맨발로 걸어 집에 갔었다. 혼자 걸어도 발로 느껴지는 진흙이 깔깔 웃는 친구 같아 심심한 줄 몰랐다. 스무 살이 되면서 많은 책임이 한꺼번에 덥석 안겨졌다. 어른은 원래 그러는 거라 해서 참고 견디고 버티며 괜찮은 줄 알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난 가끔 생각한다, 난 가축으로 키워졌고 나 또한 아이들을 가축으로 키우는게 아닐꺼 하고 말이다. 어른으로 길들여지느라 어른 노릇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는, 재미없는 멍청이가 되어가는 듯하다가 비로소 내 안의 아이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올해의 봄이 지난해의 봄은 아니지 싶다. 사람이 태어나듯 오늘의 봄도 신생아인 게 분명하다. 내 발이 그렇다고 말한다. 출산 직후 간호사가 품에 안겨 준 아기살결과 그 느낌이 흡사하다. 바람이 슬쩍 밀어 준 솔향기를 맡으며 아기 살결을 온몸으로 느낀다. 금방 태어나 꼼지락 거리는 한 생명을 느낀다. 어릴 적, 땅이 나처럼 살아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흙이 지구의 피부 같다고 나만의 정의를 내린 날이었다. 친구들을 찾느라 돌아다니다 허공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보여 그쪽으로 달려갔다. 해가 비치는 언덕배기의 넓은 밭에서 동화 속의 거인보다 더 큰 거인이 숨을 내쉬며 늦잠 자는 것을 발견했다. 잠에서 깨어나 머리가 하늘에 닿은 채 날 내려다보면 무서울 것 같아 숨 죽이고 서 있었다.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느리게 춤추다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것은 아지랑이었고 내가 느낀 건 자연의 경이로움과 웅장함이었다. 친구 찾는 일을 그만두고 멍한 상태로 집에 갔던 것 같다. 그런 게 아닌데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땅 아래에 내 것과 같은 심장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어릴 때의 그 경험이 어찌나 힘이 센지 시멘트와 아스팔트 공사로 편하게 살면서도 땅은 숨을 못 쉬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달고 산다. 그러면서도 비포장 도로를 만나기라도 하면 아직도 이런데가 있나 하니, 한 사람 안에 사는 두 마음이다.


시골마을의 봄은 내가 잘 안다. 봄이 오면 우리 마을은 하늘과 땅이 통째로 분주했다. 어른들은 강아지 발이라도 빌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한숨 섞인 말을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쉴 틈 없이 바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갈아엎는 경운기 소리가 온종일 마을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가 봄의 생기를 더해줬다고 느낀 것 같다. 지금도 봄에 경운기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벌떡 일어나 뭐라고 해보겠다며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사람의 손길이 땅을 갈아엎고 부드럽게 으깨 흙의 숨길을 여는 거라고 생각했다. 봄은 얼마 전에 태어났는데  순식간에 자라 엄마가 된다. 싹 틔울 준비가 된 흙은 품을 열어 가을이 잠든 씨앗을 맞이한다.


농촌에서 자란 덕에 자연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문 열고 마당에만 나가도 계절을 속속들이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여자아이들은 봄의 새 학기를 맞이하면 추워서 못 입던 치마를 입고 만나 들과 산으로 진달래 꺾으며 봄을 만나러 날 듯이 뛰어다녔다. 어른들은 논과 밭에서 어른들의 봄을, 땅과 하늘도 자기들의 봄을, 아이들은 아이들의 봄을 사느라 매일매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봄을 준비하느라 소리 없이 부지런했던 하늘과 땅이 자 이제 시작이다 크게 기지개를 켜니 내 몸과 마음도 엄마 따라 하는 아이처럼 덩달아 기지개를 켠다. 봄은 어떤 모양으로 너스레를 떨어도 다 이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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