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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Jan 18. 2024

잔인한 삶의 칼날에 베이다

Y는 새벽 세시까지 남편과 거실에서 영화를 봤어요. 영화가 끝나자 남편이 말했어요.

"나 때문에 당신이 잠을 설칠 수 있으니까 거실에서 자." 

"그래, 알았어. 잘 자요."

눈을 뜨니 오전 10시. 남편은 여태 자는 건지 아니면 일어났는데 아내가 깰까 봐 책이라도 읽는지 조용했어요. 뭐라도 먹으려면 깨워야겠다 싶어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습니다. 


오랜만에 Y를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었어요. 그녀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구석진 방에 앉아 있었어요. 눈 뜨는 것조차 힘겨워 실눈을 한채, 남편과의 마지막 시간을 잠꼬대하듯 드문드문 말했어요. 남편 친구들이 장례식장에 들어오는데 그중 한 사람을 남편으로 착각해 흠칫 놀랐다고 했어요. 나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말했죠. 나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녀가 말하는 동안 난 말 할 기운을 내지 못했어요. 그냥 그녀의 손만 잡고 있었습니다. 나의 시선이 창을 뛰어넘어 저 멀리까지 날아 가 어느 산 꼭대기에서 멈췄어요. 그녀가 겨우겨우 한 마디씩 내뱉는 동안 난 거기 산꼭대기에 멍하게 앉아 있었어요.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가면, 혼자 집에 가면 그때부터 이별이 시작되겠죠. 남편의 부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를 일입니다. 그 까마득한 시간을 견뎌야 할 그녀의 일상을 생각하니 막막하고 숨이 턱 막혔습니다. 내 안에 빈틈없이 들어찬 무거운 공기 탓에 숨을 제박자에 쉬기가 어려워 "아이고, 후~~"한숨만 연신 토해냈어요. 나도 이런데... 그녀는 오죽할까요. 이 뻔한 말로 내 마음이 절절했습니다. 그녀의 바짝 마른 입술이 그녀의 지금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자꾸 눈이 가고 마음이 쓰입니다. 


그녀를 두고 찬 바람이 거니는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어요. 그녀는 거기에 있어야 하니까요. 상복을 벗기고 귀엽고 발랄한 그녀의 옷으로 갈아입혀 같이 나오고 싶지만 안될 말입니다. 난 며칠만 기운을 잃겠지만 그녀는 하늘이 무너졌어요. 난 잠깐만 아프겠지만 그녀는 크리스마스가 오면 착하고 다정했던 남편의 빈자리로 몸살을 앓게 될지도 모를 일이에요. 나의 우려는 냅다 걷어차고 보란 듯이 잘 지내는 그녀를 보고 싶다며 막연한 미래를 그리워해 봅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웅크린 어깨로 걸음이 느려집니다. 하늘엔 상현달이 차갑고 사람은 가련합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마치 정신없이 재미있게 놀다 한 사람이 말도 없이 집으로 가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당황스럽고, 서운하고, 얄밉고, 마음 아픈... 더 많은 감정들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어지럽게 돌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내 정신이 쏙 빠져나가 어딘가를 헤매다 들어오고 다시 나가 방황하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니 독한 약에 취한 듯 멍한 상태로 한 나절을 하루를 지내기도 해요. 


살아있는 사람은 살게 되어있다고들 합니다. 아니 살아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두 말의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이 그래요. 살아지다 보면 어느 날 살아보자로 마음을 다부지게 먹게 되기도 합니다. 나의 엄마가 그랬어요. 갑작스레 외할아버지와 이별한 후 매일 아침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며 눈물 잔뜩 머금고 출근 인사를 하셨대요. 그러던 어느 날 매일아침의 감정이 견디기 힘들어 말했대요. "아버지 나 살아야겠어서 이젠 출근 인사 안 할게요. 잘 쉬세요." 이별의식이 아니었나 해요. 그 후로 거친 바람 같은 감정이 잦아들기 시작하더랍니다. 이젠 둘이 찍은 사진을 봐도 감정이 요동치지는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지요.


건너 들으니 Y는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미친년처럼 지낸다며 말했대요. 난 그녀의 일상을 전해 들을 때마다 기도해요. 삶이 데리고 가는 시간 동안 그러니까 살아지는 동안 밥이라도 잘 먹기를, 아프지 않기를 말입니다.

어느 날 폭우 끝에 맑아진 하늘의 해를 보듯이 매력적인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와 씩씩한 목소리 그리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다시 듣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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