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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May 02. 2024

이유 있는 수다

좋은 마음을 받았기에 울지 않을 수 있었다

혹한의 겨울, 태풍을 만난 조각배, 까마득한 터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삶에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하곤 한다. 살다 보면 자신이 이런 상황 속에 처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남편의 사업이 무너졌을 때 나도 그랬다. 하루를 살아내고 밤의 손을 잡고 오는 우울감이 무서워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고, 내일 아침은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수도 없이 했었다. 죽음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그때의 상황을 피해 쉬고 싶었던 거였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통장의 잔고를 어떻게 쪼개 써야 하나 생각만으로 이리저리 찢어 붙이며 매일 밤 고민할 때였다.


그때 거기에 동갑내기 H가 있었다. 혹한의 겨울을 견디게 하는 외투같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빛줄기같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었다.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서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온종일 함께 지낼 때였다. 내 점심밥값에 내가 마시는 커피까지 모든 계산을 도맡아 했다. 내가 평소보다 밥을 적게 먹기라도 하면 “왜 그래? 입맛이 없어?”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더 먹으라며 졸라댔고 어떤 때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에 띄게 애틋해하며 나를 챙겼다. 주위의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둘이 무슨 사이 길래 그렇게 살뜰하게 챙겨요?” 물을 정도였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갑자기 옆구리라도 콕 찔린 듯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얼굴이 화끈거리며 민망할 때 “우리가 좀 특별한 사이거든요.”H가 말갛게 웃으며 서둘러 대답했다. 난 그녀 곁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H는 그렇게 몇 달 동안 나를 돌봤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나의 고단한 삶을 돕기 위해 누군가 보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될 정도다. H는 나의 보호자 역할을 끝내자마자 결혼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전화통화를 하며 “이젠 너한테 밥도 사고 커피도 살 수 있는데 떨어져 살아 속상해.” 투덜거리듯 말했더니 “에이, 무슨 그런 말을 해. 괜찮아. 잘 살고 있으면 됐지 뭐.” 늘 그렇듯 웃으며 말했다.


H의 웃는 얼굴이 그리워 전화했더니 마침 주말이 엄마 생일이라 온다고 해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이어도 오랜만 같지 않은 편안함이 있어서 좋다. 카페의 잔디 마당 한편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다 그때의 이야기가 나왔다. 난 고마웠다 하고 H는 견디는 내가 대견했고 더 도울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런 날이 있으니 오늘이 더욱 달달하다고 마주 보며 웃었다. 그날의 새소리는 우는 게 아니라 분명 노래하는 거였고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따스한 햇살 그리고 오려 붙인 듯 매력적인 하얀 낮달까지 전부 우릴 위해 준비된 거라 마음대로 생각했다.


 한 사람의 정성 어린 사랑의 표현은 다른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돕는 커다란 힘이 된다. 태풍이 지나고, 터널을 빠져나오고, 혹한을 견디고 난 후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며 스스로 자랑할 수 없음은 돕는 손길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살면 살수록 깊어져 공손해진다. 내게서 딱히 얻을 것이 없었음에도 H는 정성을 기울여 자신을 내주었다. 나 또한 거저 받았으니 날 기꺼이 덜어내 누군가의 지지대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삶에 대해 갖춰야 할 예의가 되었다. H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던 길, 봄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춥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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