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ung Lee Nov 30. 2020

프랑스어로 쓰인 글을 읽는 것

 

나는 프랑스어로 글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해,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으니 뒤늦게 떠나온 유학에서 새로운 언어를 최대한 빨리 습득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거의 의무감을 갖고 프랑스 라디오를 틀었고, 프랑스 노래를 듣고, 프랑스 신문의 기사를 읽었다. 낯선 언어는 창연한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내 주위를 맴돌다 혀 끝에 안착하지 못하고 그냥 흘러가 버리기도 했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배운다는 사실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한국에서 고심 끝에 가져온 전혜린의 수필집과 기형도의 시집은 유학 첫해에는 책장에서 거의 나오지 못했다. 나는 모국어가 그립지 않았다. 익숙한 것들도 그립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고국을 떠난 사람이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그 시기의 내가 프랑스어로 정독한 첫 소설이다. 물론 당시 나의 불어 실력은 턱도 없었기에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느릿느릿 읽어야 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일부러 사전을 펼치지 않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는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아몬드 같았다. 나는 잘 벗겨지지 않는 아몬드의 껍질을 문장에서 건져 올려 입 안에서 굴리고 녹이고 깨물며 시간을 보냈다. 단어에 감춰진 뜻을 스스로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이런 더딘 독서가 좋았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마주할 때면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프랑스 여배우의 우아한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빗금을 그어 문장을 쪼개도 보았다. 잘게 쪼개져 너덜난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기도 했다. 그래도 알쏭한 글은 여전히 있었다. 그런 문장은 그대로 두었다. 한 폭의 추상화를 바라보듯, 나는 그 문장을 들여다봤다. 막연하여 이해되지 않는 것에는 미지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프랑스어로 쓰인 글을 읽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내뿜는 추상성이다.  

 

어학연수가 끝나고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불어로 된 글을 원 없이 읽어야 했다. 석사 과정 첫날, 논문 주제를 의논하기 위해 나는 지도교수님과 일대일 면담을 했다. 논문 주제가 19세기 말의 초상화로 가닥이 잡혔을 즈음, 갑자기 교수님이 내게 불문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물었다. 거짓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밑천을 내보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교수님의 질문이 쏟아졌다. 마뜨모아젤 리, 에밀 졸라의 책을 읽어봤나요? 플로베르의 책은요? 모파상은요? 스탕달은요…? 모파상의 단편들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번역본으로 읽긴 했지만, 그 소설에 대한 교수님의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지면 대답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건 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 눈을 뚫어지듯 바라보는 교수님의 시선을 피하며 난 애꿎은 벽만 바라보았다. 교수님은 나의 빈약한 문학적 소양을 이해했다는 듯 다소 건조한 말투로, 그런 지경이라면 19세기 프랑스 회화에 관한 논문을 쓰는 게 힘들 거라고 말했다. 미술사는 미술의 역사만이 아니라고. 문학을 알아야 한다고. 지금부터라도 당장 에밀 졸라의 책을 불어로 읽으라는 조언을 덧붙이며...

 

그때부터 나는 프랑스어로 읽어야 하는 것들과 읽을 수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단기적 목표는 일 년 내에 8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높은 수준의 불어로 쓰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를 갖고 우아하게 아몬드 껍질을 입에서 굴리고 녹이고 깨무는 류의 독서는 불가능했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내 손에 단단한 망치가 쥐어져 있다면, 껍질에 둘러싸인 아몬드 같던 모든 낯선 단어들을 그러모아 마구 두들겨 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논문과 관련된, 당연히 대부분 불어로 쓰인 글들을 절박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 가운데 고급스러운 표현은 건져 올려 머리에 구겨 넣었다. 내 곁을 스치는 거의 모든 이들이 내게 도움을 주었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의 동료들, 지하철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낯선 이, 바게트를 기다리는 줄에서 만난 이웃집 마담 등, 나는 누구에게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의 의미를 물었다. 토론하기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대부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질문에 응해주었다. 이렇게 일 년 가까이 ‘읽고-묻고-이해하고’를 반복하자 불어로 된 글을 읽는 데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글이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하지만 그렇게 읽는 글들은 내게 더는 아름다운 추상화가 아니었다.  

 

모국어로 쓰인 글이 다시 읽고 싶어 진 건 고난했던 석사 과정이 다 끝난 뒤였다. 고독한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집이 평소보다 더 아늑하게 느껴지듯이 한글로 읽는 글들이 얼마나 포근했는지 모른다. 작정하고 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하자 내 몸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던 무언가가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외면하고 있던 그간의 외로움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이상의 소설과 김수영의 수필을 읽으며 마음 안에 고여있던 외로움을 조금씩 끄집어냈다.        

 

이제 나는 어떤 의무감 없이 불어와 한글로 된 글을 자유롭게 오간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는 여전히 무수하지만, 유학 첫해 <연인>을 붙잡고 그랬던 것처럼 문장의 어렴풋함을 즐긴다. 그렇게 내가 읽는 글은 추상이었다 구상이 되기도 하고 추상이었다 계속 추상으로 남기도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