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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광 May 30. 2024

변신 로봇 이야기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봄날에 나는 이제 그만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의 밥벌이를 걱정한 지 십 년이었다. 유학은 대체 갈 수 있을지, 간다면 버텨낼 수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만 결국은 돈 문제였다. 돈이 없었다. 그 때문에 겪어야 하는 모든 일들이 지겨웠다.


허름한 바람막이에 배낭 하나만 매고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내가 아무래도 수상쩍었던지 세관원이 가방을 조사했다. 얇은 옷가지 몇 장 밑에서 두꺼운 웹스터 토플책이 튀어나오자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벚꽃을 보러 왔다”고 하자 어제 내린 비로 꽃이 많이 떨어졌다며, 구경거리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가나자와(金沢)는 쌀쌀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그마한 항구도시의 외곽은 마치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나는 아침이 되면 배낭을 둘러매고 싸구려 여관을 빠져나와 시들어가는 벚꽃을 구경했다. 등대만이 쓸쓸한 일본 앞바다는 깊고 검었다. 밤이 되면 항우울제 한 줌을 털어 넣었다. 나는 아무런 결심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막다른 길목이었다.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 내어 울어보고 싶었지만 지쳐버린 눈에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울보였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큰 소리로 울었다. 그때마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를 소리 높여 불렀다고 한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스무 살에 집을 박차고 나온 뒤로 아버지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 이후 십 년은 우리 모두에게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햇살이 아름답던 놀이공원 사이를 누비던 장면은 여전히 내 기억 속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다. 사진 속 아버지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내가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바나나를 한 개 사 와서 내 손에 들려주었다. 파랗고 떫었지만 아버지도 나도 그것이 덜 익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특유의 향기는 코끝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나는 한두 번 베어 물고는 더 먹지 못했고, 아버지는 남은 바나나를 묵묵히 씹어 삼키고는 껍질을 버렸다.


이제 와서 아쉽다거나 눈물이 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 기억은 석회화되어버린 과거의 편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아버지나 내가 어떤 식으로든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었을까. 내가 슬프지 않다고 해도, 이것은 어쨌거나 서글픈 일이다.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시절에는 역설적으로 당신과 함께 시간을 향유할 만한 거리가 참 없었다. 아버지는 늘 지쳐 있었고, 함께 드잡이질을 하다 지겨워져도 나를 어딘가 “괜찮은” 곳으로 데려가기에는 당신 말씀처럼 아버지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유행처럼 세워지던 과학전시관의 장난감들은 금세 망가지고는 몇 년 동안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멀거니 나를 구경하던 아버지처럼 곧 심드렁해지고 말았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변신 로봇을 사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나는 로봇을 직접 만들겠다며 아버지에게 무쇠로 된 강판을 구해 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나는 16절 갱지에 사람이 탈 수 있는 변신 로봇의 설계도를 신나게 그렸다. 품질 낮은 16절지는 당시 우리 집에 넘쳐나던 유일한 장난감이었다. 동네 문방구에서 오백 원을 내밀면 주름투성이의 할아버지가 종이를 아무렇게나 집어서 한 묶음씩 주곤 했다. 양은 그때그때 달랐다.


아버지가 무쇠 강판을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나는 어쩌면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학 꿈나무이던 내가 ‘중크롬산암모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화학물질을 주문하자 아버지가 바로 다음 날 거짓말처럼 한 봉지를 들고 왔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크롬산암모늄을 흙으로 덮고 불을 붙이자 회색 마그마가 뿜어져 나왔다. 화공약품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몰래 한 주먹 퍼다 준 것이었지만, 나는 철이 없었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강판을 구해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이 거짓말에 불과함을 깨닫고 속았다며 슬퍼할 뿐이었다.


욕망이 거세된 아이는 쉽게 침울해진다. 그것은 어린 나이로 견디기에는 힘겨운 비참함과 고통을 안겨 준다. 몸이 작다고 해서 고통의 크기도 작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삶이란 녀석은 대상의 사정을 봐 주면서 짓누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식으로 나는 아버지와 멀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철이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고통스러웠을 것이었다. 결국은 돈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월남전에 휩쓸려 들어갔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휩쓸려 들어갔다”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자원했으니까. 월남에 가면 돈을 많이 준다, 라고 부대장이 말했고, 아버지는 손을 번쩍 들었다. 중대에서 아버지 혼자 뽑혔다. 그때 아버지는 중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 보았느냐. 아버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긴 일과 전장에서 피를 묻히지 않는 일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가끔 생각한다. 월남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진급 제안을 마다하고 군에서 뛰쳐나왔다. 이후 몇십 년 동안 아버지는 대구 3공단을 전전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려 애썼다. 아버지의 월급을 받아먹은 엄마는 마음의 병에 걸렸고, 나는 가족을 내버리고 혼자 서울로 도망쳤다.


나는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나이가 되었고, 스스로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에게는 비극일까. 어쨌거나 나는 오늘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서른 살의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나에게 무쇠로 된 강판을 구해다 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버지에게나 나에게나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는 내 소식을 듣더라도 울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군인이기 때문이다. 시뻘개진 눈으로 어찌어찌 이국으로 향한 아버지는 반듯하게 누워 있는 나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서야 비로소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버지는 남들 다 하는 해외여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월남으로 갈 때 한 번, 그리고 월남에서 한 번, 수송선과 헬기를 타 보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오랜 자랑거리였다.


엄마가 병으로 고생하는 동안 아버지는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으면서도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내가 달아나버린 이후로도 아버지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엄마의 병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여전히 모른다.




언제나처럼 흐리던 어느 날 오후, 나는 한 무리의 촌아이들을 만나 사진을 찍어 주고 답례로 그 아버지가 눌러 주는 셔터 앞에 어정쩡하게 몸을 내맡겼다. 사진 속의 나는 뿌옇게 웃고 있었다. 슬슬 서울로 돌아가도 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가나자와로 온 지 두 주만이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두 주의 여행이 무언가를 더 낫게 만들어준 것도 아니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만이 남았을 뿐이다. 나는 끝내 유학을 가지 못했고, 여전히 내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다.



《시사문단》 21년 1월
Cover Image from Unsplash by Tincho Fr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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