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던 1991년 6월 4일은 내 뱃속에 만 5개월의 당신의 첫 외손 주사 들어있었던 시절이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일이 있다.
방위산업으로 광양의 포항제철연구소로 내려가게 되어 결혼을 하고 광양댁이 됐던 내가 마침 당시 방위산업훈련의 기준이 잠시 바뀌어 대구로 6주간 훈련병으로 입대했던 새신랑이던 옆지기의 호출로 시어머님과 만오 개월의 불룩한 배의 임산부로 대구 비행장에 내렸다 같이 돌아와 피곤해서 아빠와 전화통화를 하고 휴일인 6월 6일에 친정으로 가기로 했던 6월 하고 1일..
그 통화가 생전의 아빠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틀을 시댁에서 쉬고 찾아갔던 친정에서 듣게 된 아빠의 사망 소식...
이야기가 본론에서 또 빗나가고 있다.
아무튼 아빠의 장례를 치르던 임신 만 5개월의 장녀였던 나는 그때 부부가 30년을 같이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깨달았었다.
그 해가 아빠 엄마의 결혼 기념 29년이 되는 가을 전 초여름 6월이었으니까..
그렇던 내가 올봄으로 결혼 30년을 지나쳤다.
부부가 살면서 좋은 일만 있었을까. 어느 부부에게라도 말이다.
어쨌든 올 해도 10월 하고 30일은 돌아왔고 ,
60년을 같이 하신 시부모님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다.
맏며느리로써 무엇을 해 드릴까 , 실은 봄부터 고민하다 코로나도 신경 쓰이고 얼마 전 시어머님께서 넘어지시며 손도 다치셔서 간단하고 조용하게 준비했다.
어찌 보면 유치할 수도 있는 선물이지만
아버님 어머님께서 의외로 너무 기뻐하시는 음성에 흐뭇하면서도 아빠 엄마 생각에 울컥한 어제이기도 했다.
섬진강변에서
우리 아빠가 마지막으로 같이 다녀가셨던 하동 송림유원지 소나무 숲을 떠올리며,
어제는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던 또 다른 소중한 추억의 날이 돼버렸나 보다
아빠 엄마의 약혼사진이셨던 ( 나와 내동생)
대학원졸업시절의
새색씨 였던 시절 아빠엄마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중 하나의 두 아이(1995년 봄 일본이사 전에),아빠가 좋아하셨던 섬진강변의송림공원에서 (첫외손주를보지도 못하고 태몽만 꾸어주셨던 외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