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풍의 언덕' 리뷰
이 영화를 보고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아껴두었던 영상들을 보려고 했다. 그 첫 번째 영상이 바로 이동진 평론가님의 '폭풍의 언덕' 리뷰 영상이었다.
나는 보통 영상을 켜놓고 초반에 댓글들을 쭉 훑어본다. 이 영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대충 어떤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별 이유는 없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내가 궁금한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와 비슷한지 다른지 궁금해진다. 당연하게도 이 영상의 댓글 대부분이 영화 자체에 대한 감상평을 내놓았는데, 대부분의 반응이 '실망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원작을 지나치게 훼손시켰기 때문에.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댓글이 있었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싸구려 팬픽 같다'는 말이었다. 이 영화를 표현하는 아주 찰떡 같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물론 지난 영화들도 몇몇 본 사람으로서 거들자면 이 영화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작품을 얼마나 잘 고증하는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원작의 차갑고 서걱거리는 배경 속에서 절대 섞이지 말라고 세상이 갈라놓으려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애절하게 사랑하는, 끝없는 바닷속을 꽁꽁 감춰둔 채 잔잔하기만 한 수면 같은 감성이 영화에선 전혀 구현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보다 훨씬 빠르고, 폭발적으로 인물들이 충돌하고, 그 인물들을 부추기는 연출이 관객의 시선을 바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가 예쁘다. 세차게 몰아쳐 절벽을 깎아대는 날카로운 파도 같은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감독이 광고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본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원작과 감성도 달라, 추구하는 방향도 달라, 중요한 인물들은 대폭 요약되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섹스 가득한 불륜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응당 분노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팬픽 같다'는 그의 말에 동의는 하면서도 '싸구려' 같다는 말에는 정중히 반기를 들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난 이 영화를 단 한 장면도 흘려보내지 못했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 영화로 인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난 이 영화가 좋았다. 취향의 문제도 있겠다. 난 '어톤먼트'나 '스윗 프랑세즈'처럼 사랑에 몸부림치다 못해 내 온몸이 부서지더라도 상대에게 부딪치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니 난 앞서 말하고 싶다. 사실 모든 2차 창작물이 다 원작의 팬픽이라고. 우리가 그것을 .txt로만 보며 소비하느냐, 책으로 만드는 등 기어코 손에 넣어 곱씹고 또 곱씹고 마는 '작품'이 되었느냐를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난 이 영화가 충분히 자기 가치를 증명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원작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원작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창작해냈다, 그렇게 본다. 탐닉하고 싶은 영화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조건.
재미가 있느냐?
난 재밌었다. 이제 그걸 써보려고 한다.
오프닝 시퀀스가 상당히 충격적이다. 한 남자가 교수형에 처한다. 보통은 목이 매달린 채 발판이 치워지면 낙하하는 충격으로 목뼈가 부러져 즉사한다. 하지만 이 남자처럼 재수없게 목뼈가 부러지지 않으면 그 다음부터는 시간과 고통의 싸움이다. 죽을 때까지 목이 졸리고 숨이 막히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어린 캐시와 넬리를 포함한 군중들이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어떤 철없는 소년들은 이 남자의 발기한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히죽거린다. 지켜보고 있던 한 수녀가 소년들에게 "더러운 놈들!"이라며 비난했지만 돌아선 수녀의 표정엔 미묘한 미소가 담겨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수녀와 마찬가지로 흥분에 달아오른다. 긴장한 것 같았던 캐시와 넬리도 기대에 찬 얼굴로 남자의 죽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의 숨이 끊어졌을 때, 어떤 이들은 기쁨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죽을 만한 사람이 죽었다고. 남자의 몸이 죽음과 함께 사정했을 땐, 어떤 사람들은 그와 함께 오르가즘을 느꼈다. 교수형은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선 축제의 신호탄이었다. 말 그대로의 축제가 열리기도 했지만, 다시 말하면 억눌려 있던 욕망이 폭죽처럼 터뜨려진 절정의 장이기도 한 것이다.
기괴했다. 사람의 죽음을 놓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가 어떤 이유로 교수형에 처했는지와 상관없이 사람이 죽어가는 모든 순간을 적나라하게 구경하면서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오르가즘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속에서 인생에 첫 야동을 본 듯이 신나 언덕을 달리는 캐시와 넬리의 모습이. 불과 몇 세기 전엔 분명 처형이 군중들의 유희거리였대요- 옛날엔 다 그랬대요-하고 누군가의 입으로나 글로 듣거나 읽는 게 아니라 직접 연출된 장면을 보자니 야만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근데 이 장면이 왜 오프닝에 쓰였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수형을 숨죽여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자신만의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취향. 군중 속에 숨어있을 때에서야 조금이라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더럽다고 여겨지는 솔직한 욕구. 오프닝 장면에서의 '기괴함'이 바로 이 영화가 추구하는 방향성 그 자체였다.
비참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졸부와의 결혼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캐시와 캐시가 자신을 아무리 때리고 내치고 버려도 개처럼 캐시를 따라다니겠다는 히스클리프의 사랑. 이 둘의 사랑은 불륜이라는 빌연적 비극을 등에 업고서라도 떼어놓을 수가 없는 광적인 욕망이다. 서로가 죽길 바랄 정도로 미워하지만 숨이 막히도록 껴안고만 싶은 두 사람의 지나친 집착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에서 생각하고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 그렇게 기괴할 수가 없다.
주인공들만 기괴한 욕망을 가진 게 아니다. 캐시의 얼굴 가죽을 그대로 떼어다가 벽을 꾸민 것 같은 방을 만든 에드가는 집 전체가 전부 기괴한 모습을 띤다. 지나칠 정도로 동화스러운 티티새 농원 저택은 조화로운 디자인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비싼 것이라면 죄 사들여 장식한 졸부의 미숙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에드가에겐 졸부라는 주체와 캐시의 남편이라는 자아뿐이다. 캐시의 의견에 따르고, 고용인의 의견에 따른다.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모른 채 오로지 돈만 쓴다. 에드가가 캐시를 사랑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단조로운 자세는 어쩌면 캐시를 위한 사랑이 아닌 에드가 본인이 상대에게 줌으로써 누리고 싶은 만족감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스포일러 주의)
이사벨라의 캐릭터가 원작과 가장 멀어져 있는데, 원작에서 이성 경험이 전무한 철부지 부자 아가씨가 히스클리프라는 야수에 버금가는 광인을 사랑하면서 스스로 폭력에 노출돼 비극적인 결혼생활을 맞이하는데 반해 영화 속 이사벨라는 기꺼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서커스 사자 같은 모습에 가깝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관계에서 사디스트가 주인인 것으로 보기 쉽지만 사실 이 관계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마조히스트라는 말이 있다. 고통의 정도와 방법을 조절하는 사람이 바로 마조히스트이기 때문이다. 이사벨라가 딱 그렇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 아닌 상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상대 또한 무릎을 꿇려 자신과 눈을 마주게 하는 인물이다. 아주 영악하다.
마지막으로 넬리. 넬리는 캐시와 친구 사이지만 동시에 주종관계에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애증과 열등감으로 모든 인물들 사이를 이간질해 관계에 균열을 내는 역할을 해낸다. 귀족 가문의 버려진 사생아라는데서 오는 자격지심이 한몫 했을 것이고, 그래도 그냥 하녀 아닌 주인집 아가씨와 친구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냄새나는 부랑아 녀석이 나타나 캐시의 몸과 마음과 관심을 전부 뺏어가버리니 거슬려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캐시가 행복한 모습, 캐시가 사랑받는 모습 다 꼴도 보기 싫어.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말괄량이에게 나의 소중함을 알려줘야겠다. 알량한 자존심에서 시작됐을 넬리의 욕망이 결국 어긋난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길잡이가 됐다.
이들의 사랑과 증오, 뒤틀린 욕망과 혹시나 싶은 희망도 없는 비극적 결말을 2시간 동안 지켜보는 관객의 모습이야말로 오프닝 속 교수형을 지켜보는 군중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영화는 말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다 똑같은 인간으로서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이 욕망을 제대로 다듬고 다루지 못해 교수형을 당하는 죄수와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비참한 결과를 경험해본 적이 있다는 것. 솔직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사람을 잃어도 보고, 성숙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상대를 상처주기밖에 하지 못하는 미숙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좀 더 깊게 들여다보자면 사회적으로 정해진 주종관계를 사랑과 욕망을 매개로 전복시키는 데서 오는 쾌락을 보여주기도 하다. 캐시와 히스클리프, 캐시와 넬리,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 에드가와 넬리까지. 기존의 질서를 깨뜨림으로써 욕망을 해소한다. 하나 혹은 둘 모두가 황홀경에 취한다. 원래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비로소 취했을 때의 성취감. 휘둘리는 갑을 바라보는 열쇠를 쥔 을의 만족감. 이 쾌락들은 가히 중독적이다. 옳지 못하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절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이 사랑이 망할 때까지도.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이 관계들은 결코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없기에, 허락되지 않은 쾌락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이들의 쾌락은 절망이 되고, 그 어떤 여지도 없이 절망한 채로 가라앉으며 영화가 끝이 난다.
과연 이것이 <폭풍의 언덕>과 동떨어진 주제의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좋다고 추천한 영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상대가 싫으면 싫은 거다. 반대로 내가 아무리 싫다고 절대 보지 말라고 애원하더라도 상대가 좋다면 좋은 거다. 가장 최신작을 보거나 읽어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 감상, 해석이 전부 다 다른데 하물며 세기를 뛰어넘는 고전작은 오죽할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2차 창작물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가를 고민해본다.
과연 원작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구현해내는 것이 옳을까? 원작을 훼손한다는 건 정확히 어떤 기준이 적용될까? 원작을 어느 정도로 비트는 것까지가 허용될 수 있을까?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할 때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례는 뒤샹이다. 그는 변기에 이름을 적었을 뿐인데 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레디메이드 개념을 최초로 예술에 도입한 작품이라나 뭐라나. 뒤샹이 변기에 이름을 써 전시품으로 내놓음으로써 변기는 누군가의 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잃었다. 그렇다면 뒤샹은 변기를 훼손한 걸까? 만약 뒤샹이 공산품 변기가 아닌 자신이 직접 변기를 만들어 이름을 쓴 거라면 괜찮은 걸까? 만약 그랬다면, 뒤샹이 변기 모양의 조각품을 만들어 자기 이름을 적은 것이라면, 지금과 같은 예술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비유가 극단적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2차 창작은 이런 식이다. 세상에 완벽하게 순수한 최초의 창작은 현재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고 영감을 얻어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예술을 한다는 건 나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구현시켜 세상에 내놓는 일이다. 나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선보이기 위함이다. 예술을 받아들이는 그 누군가는 이것에 대해 생각한다. 관찰하고 탐닉한다. 감상하고 해석해 의미를 부여한 끝에 자신의 세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의 세상이 예술가의 세상을 향해 확장된다. 예술가와 관객의 세계가 서로 연결돼 사고의 영역을 뻗어나가는 과정의 순환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이 작품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의 예술이 훼손됐다고 볼 수 없다. 반대로 관객의 해석을 예술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또한 예술이 훼손됐다고 볼 수 없다. 즉, 예술은 작품과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을 뜻한다.
이 지점에서 난 이 영화가 충분히 하나의 작품을 내놓았다고 본다. 워더링 하이츠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또는 자신에게 갖는 욕망 그 자체를 조명했고, 토해내지 못해 속에서 썩어 문드러져가는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해 시각적-청각적-심미적으로 대폭 끌어올린 영상디자인물. "영상예술"이라고 본다. 좀 더 있어보이게 말해보자면, 원작이라는 거대한 텍스트 안에서 가장 날것의 욕망이라는 특정 주파수를 끄집어내 그것을 증폭시킨 영리한 변주였다고 말이다.
감독은 어쩌면 <폭풍의 언덕>을 광적으로 사랑해 요소마다 뜯어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폭풍의 언덕>을 너무 싫어해 자신만의 색채로 덧그려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분명 스토리적으로나 캐릭터를 구축하는 정도 등등에 있어서는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였다. 원작내용에 대해 전혀 무지한 사람들은 첫 관람에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생략되고 뒤틀린 지점이 꽤 있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캐시와 히스클리프가 서로에게 얼마나 집착적인 성적 욕구를 느끼는지를 보여주는데 더 신경을 쓴다. 그런 점에서 원작을 존중하지 않는 캐스팅과 스토리의 변주가 원작을 사랑하는 팬들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의 여러 주제 중 하나인 가장 원초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의 욕망을 거칠지만 솔직한 워더링 하이츠와 생동감 넘쳐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인 티티새 농원으로 비유했다는 점, 그리고 인물들의 원초적인 욕망을 숨김없이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었다.
적어도 내겐 이 영화에서 나오는 수많은 정사씬들이 하나도 외설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저 돌고 돌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청춘 남녀들의 폭발적이고 애절한 사랑으로 보였다. 그러니 영화 말미에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냈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질 못했다.
내겐 좋은 영화였다.
여담, 히스클리프가 처음 면도를 하고 나타났을 때 너무 잘생겨서 진즉에 면도를 했더라면 캐시가 절대 고민을 안 했을 텐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