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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Nov 27. 2020

스물다섯 보내기

4학년으로 복학하고, 졸업을 하기 위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부를 하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졸업논문을 제출했다.   내내 졸업논문을 쓴다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쓰고 싶은 글도  쓰면서  많이도 노력했다. 그래 봤자 학위논문이라고 너무 노력해서 쓰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쓰고 싶었다. 사실 내가 써내는 모든 글은  쓰고 싶다. 그런 욕심이 있다. 어쨌든.

대학교 3학년을 보내고 2 간의 휴학, 그리고 4학년 복학. 스물다섯의 내가 졸업한다.

조금 있으면 스물여섯이다. 그런데 나는 스물여섯이  자격이 있을까?

쇼미더머니 9 출연한 머쉬베놈이 2 예선에서 이번에 우승할 각오가 되어 있는  같다는 심사위원의 말에 “조금 늦은 나이지만 영보스(young-boss)  !”이라고 답했다. 구수한 말투와 왠지 모를 중후함까지 느껴져 그의 나이가 서른이 넘을 거라 조심스레 가늠하고 있던 나는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이란 사실을 알았다. 나의 친오빠보다   어린, 그야말로 나의 또래. 그러나 그는 말했다. ‘조금 늦은 나이라고.

충격을 삼키고 댓글창을 확인했다. 아무도 그가 말한 스물일곱의 나이가 늦은 나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삼켰던 충격을 토해냈다. 스물일곱이 늦은 나이라니. 우승을 하기에 스물일곱은 너무 늦은 나이일까? 어쩌면 쇼미더머니 9 주 시청층이 비교적 10-20대에 집중되어 있어 그렇다고 생각이 든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스물일곱이란 나이는 정말 늦은 나이인 걸까?

스물여섯에 임박한 내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을 받아도  말은 없다. 하지만 토해낸 충격을 깊이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스물일곱이 조금 늦은 나이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대학교 3학년을 보내고 2 간의 휴학을 선언했을 , 나를 말리던 지인이 그런 말을 했다. “네가 휴학하면 스물다섯에 4학년이겠지? 졸업하면 스물여섯이지? 네가 휴학하는 동안을 얼마나 알차고 값지게 보낼지는 모르겠지만 군대도  다녀온 스물여섯 여자가 군대 다녀온 스물여섯 남자와 같은 선상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해? 휴학 중에 그럴싸한 경력 하나 쌓지 못하면 스물여섯까지 신입 채용 공고에만 매달려야  텐데, 네가 면접관 입장에서 같은 면접자라면   어린 사람을 뽑고 싶지 않겠어?” 지인의 직설적이고 조금은 과하기도  조언의 유효를  글에서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회적 통념이란 것이 나이에도 작용한다는 사실이 이제야 새삼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비단 지인의 섣부르지만 다정한 말만으로 판단해야  문제는 아니지만, 어디   솔직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나이가 스물여섯 이상이라는 말을 들었을 , 단순히 당신의 나이보다 어리기 때문이 아닌  그대로 ‘어리다 생각이 바로 드는가? ‘어리다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십  중후반이라고 하면 직장이 있거나 소득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뭐라도 하고 있을  같지 않은가? 누군가와 만나 서로를 알아갈  이십  후반이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물어보게 되지 않은가?

뭐라도 하고 있을  같은 이십  후반.
뭐라도 해야   같은 이십  후반.

 세상의 이십  후반이 되기가 무섭다.

  때의 , 이십  초반의 나도 이십  후반의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쯤이면 뭐라도 하거나 되어 있을 거라고 거진 확신을 했었다.  막연함에 덩그러니 남겨진 지금의 나는  세상의 이십  후반이 되기가 무섭다.

아직  하고 싶은  많다. 하지 못한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쓰고 싶은 글이 넘치도록 많다. 그런데 지난날을  글들을 쓰지 못해 보내버려 지금의 내가 조금 늦은 나이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잠깐. 억울하지 않은가. 최대 수명이 자그마치 120세란다. 나의 할머니들께서는 팔순이 넘으시고도 여전히 정정하시다. 평균 수명이 100세라고 쳤을   나이는 고작 5분의 1 지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나는 아직  날이 많은데 나의 가능성을 나이에 맞춰 재단하고 싶지 않다.

나이의 의미와 기능은 투표권의 여부와 성인 인증의 여부 이외엔  부질없다. 나이로 인한 갈등은 모두 관계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어려서, 나보다 나이가 들어서 생기는 누군가와의 갈등. 어리든 어리지 않든 내가 존중받아야 하는 만큼 상대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야 하는  당연하다.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과 비교해 존중받아 마땅한 나를 초라하게 만들거나 상대를 초라하게 만들 필요 없다.

재단하는 모든 단어는 상대적이다. 기준을 누구로 잡느냐의 차이.  이전에 누구와 누구,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기 전에  자신의 열등을 인정하고 우수를 향해 나아가는 집중의 정도.

스물다섯이 끝나간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없다. 나이가 들어가서 달라지는  아니라 나의 움직임이, 발자취가 멈춰 있지 않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다.

스물여섯을 두려워하지 말자.  어떤 나이가 되어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무엇이든 하지 않을 , 누구와의 차이를 가늠할 , 그때가 늦은 거지. ‘조금 늦은 나이 이미 지났다.

나는 이제 나보다 이른 나이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스물다섯 이후의 나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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