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연애 끝에 이별한 순간

by 은파랑




이별은 끝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시작부터 곁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연애 끝에 맞이한 이별은 함께 걸었던 모든 날들과의 작별이었다. 그 순간은 우리가 쌓아 올린 시간의 탑이 서서히 무너지는 듯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날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말없이 마주 앉아 있던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세상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내뱉는 말들은 공허하게 흩어졌고 눈빛은 더 이상 서로를 향하지 않았다. 익숙했던 손길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사랑이 식었다기보다 더 이상 같은 꿈을 꾸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더 고통스러웠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순간 시간은 비정하게 느릿하게 흘렀다. 모든 말이 목에 걸려 더는 나아가지 못했고 침묵 속에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잘 지내”라는 짧은 한 마디가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우리가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이 낯설고 아팠다.


이별 후의 시간은 잃어버린 나침반처럼 방향을 잃고 떠다니는 날들이었다. 길거리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멈춰 서야 했고 우연히 마주한 추억의 흔적들은 마음을 찢어 놓았다. 함께했던 계절들은 여전히 빛났지만 그 안에 내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사랑은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아 더 이상 다가올 수 없는 빛나는 시간으로 남았다. 더 이상 함께하지 않지만 그 순간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랜 연애 끝에 맞이한 이별은 한 편의 오래된 영화를 떠나보내는 것과 같았다. 눈부신 장면들,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기억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의 침묵까지 모든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고 이제는 그것을 품에 안고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잔잔히 흐르며 더 깊고 넓은 사람이 되게 해 주리라는 희망, 그것이 사랑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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