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310
하루의 끝자락, 세상은 조용히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분주하게 흘러가던 시간의 강물이 잠시 멈추는 듯한 순간, 흐름 속에서 가만히 멈춰 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있는 시간. 내가 잊고 지냈던 고요한 섬으로의 여행 같다.
멍하니 앉아 있으면, 나를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이 창가를 스쳐 지나가고, 커튼이 살짝 흔들리며 속삭임을 전한다. 방 안을 감싸는 적막은 텅 빈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다. 고요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발견한다.
멍 때린다는 것은 모든 책임과 생각을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못한 것’의 무게로 가득했던 하루를 놓아주고, 나를 구속하던 의무와 계획의 사슬을 푸는 순간이다. 그 순간, 단순히 존재한다. 누군가의 역할도, 무엇을 이뤄야 하는 사람도 아닌, 그냥 ‘나’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자유는 마음을 회복시킨다. 머릿속의 혼란이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고, 흩어졌던 생각들은 물 위에 떠다니는 잎사귀처럼 차분해진다. 멍하니 앉아 있던 그 몇 분 동안, 내가 잃어버린 나를 천천히 다시 만난다.
멍 때리는 시간은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는 작은 의식이다. 이 시간은 하루를 평가하지도, 내일을 계획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오늘의 풍경이 떠오른다. 따뜻했던 햇살, 스쳐 지나갔던 미소들, 그리고 지나온 길 위의 작은 흔적들.
이렇게 하루를 멍하니 마무리하면, 내일은 조금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들이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것처럼, 멍 때리는 순간은 삶 속에서 작지만 빛나는 여백이 된다. 그리고 여백 속에서 오늘을 내려놓고, 내일을 담을 준비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