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선다. 어둠이 짙어지는 순간, 눈앞에 하나의 형상이 떠오른다. 십자가, 초승달, 만자(卍).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지만,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눈에 보이되 마음으로만 만질 수 있는 것. 그것은 상징(象徵), 곧 신앙의 등불이다.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던 어느 날, 한 사내가 무거운 나무를 지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가시에 찔리고 채찍에 맞아 피로 물든 몸이었으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십자가는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의 극한에서 탄생한 사랑의 기념비이자, 죽음에서 다시 솟아오른 희망의 문장이다. 어둠이 덮칠 때마다 형상을 바라본다. 그러면 들려온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빛은 상징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사막의 밤은 고요하고도 깊다. 모래바람이 부드럽게 옷자락을 스치고, 하늘에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걸려 있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땅에 이마를 대고 기도한다.
"길을 밝히소서."
초승달은 신의 인도를 상징한다. 그늘이 진 날들 속에서도 완전한 보름달을 향해 나아가는 형상. 그것은 인간의 여정이기도 하다. 결핍 속에서도 우리는 빛을 좇는다. 믿음이란 아직 보이지 않는 둥근달을 상상하는 것, 언젠가 차오를 것을 믿고 밤을 건너는 것.
고요한 산사(山寺). 단청이 선명한 대웅전 문 앞에 하나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만자(卍), 네 개의 팔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간다. 그것은 우주의 흐름이자, 깨달음의 순환이다. 인생은 늘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듯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한다. 무상(無常)을 깨달으며, 번뇌를 넘어선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 붓다가 미소 짓던 그 자리에서, 우리 또한 가볍게 눈을 감는다. 만자가 돌고 돈다. 삶과 죽음이 흐르고, 신앙은 그곳에서 쉼 없이 숨을 쉰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손짓이다. 누군가는 십자가를 붙들고, 누군가는 초승달 아래 기도하며, 또 누군가는 만자의 의미를 곱씹는다. 하지만 상징이 다른 듯해도 길은 하나다. 사랑을 향해, 진리를 향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밤이 깊어도 길은 존재한다. 신앙의 상징들은 그것을 가리킨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이들에게, 저마다의 등불이 빛나고 있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