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린 도시,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 기도를 올린다.
“신이시여, 정의를 주소서.”
그런데 기도 끝에서 총성이 울린다.
기도 끝에서 한 생명이 쓰러진다.
기도 끝에서, 세상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신의 이름이 검이 될 때, 신앙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어떻게 경전이 전쟁의 깃발이 되고, 기도가 복수의 언어가 되는가?
신념이 깊어질수록 세상은 단순해진다.
흑과 백, 옳고 그름, 우리와 그들.
하지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은 무수한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폭력은 언제나 신성한 것처럼 말하며 나타난다."
그렇다. 폭력은 종종 정의를 가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정의일까?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적 극단주의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불안과 분노의 시대에 태어난다.
절망 속에서 태어난 신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분노한다.
"우리는 버려졌다."
그때 누군가 말한다.
"신은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를 이용한 자들이 문제다."
그 말이 씨앗이 된다.
정체성의 위기와 회귀 본능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린다.
"우리는 누구인가?"
극단주의는 대답한다.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신앙의 전사다."
그리고 검을 쥐여준다.
정치와 종교의 뒤얽힘
권력자들은 신을 정치의 도구로 삼는다.
사람들은 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조종하는 손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한때,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십자군이 칼을 휘둘렀다.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그러나 신은 침묵했다.
2001년, 뉴욕의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비행기가 건물을 뚫고 들어갔을 때,
조종석에서는 마지막으로 신의 이름이 불렸다.
IS는 자신들의 '천국'을 세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것은 피의 제국이었다.
2019년, 뉴질랜드의 작은 모스크에서 기도가 울려 퍼질 때,
한 남자가 총을 들고 들어왔다.
그 역시 신념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력하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이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될 것인가?
종교는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 없이 가르쳐진 신앙은 독이 된다.
종교 교육이란, '왜'라고 묻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배제된 자들은 극단을 향한다.
사회가 그들을 품을 때,
폭력은 더 이상 피어날 곳이 없다.
신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권력자들은 그것을 이용했다.
종교와 정치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신앙은 더 이상 전쟁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을 무기로 삼은 테러는 전 세계를 향한다.
그렇기에 함께 답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지만 어쩌면 신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너희가 신을 믿는다면, 왜 이런 일을 벌이는가?"
신앙은 사랑이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손에서 신앙은 때론 칼이 된다.
우리는 칼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신의 이름 아래, 다시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언젠가, 광장을 지나가는 한 청년이
손에 폭탄이 아니라 꽃을 들고 있을 그날을 기다리며.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