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함의 작은 걸음

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89

by 은파랑




신중함의 작은 걸음


골목 끝, 오래된 가로등 밑에서 신중함을 머금은 발걸음을 생각해 본다. 누군가는 신중함을 ‘멈칫거림’ 혹은 ‘머뭇거림’으로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잠시의 멈춤이 곧 삶의 방향을 가르는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예감을 구분해 내는 일, 목소리가 아닌 침묵에 귀 기울이는 일. 모든 것은 한 겹 더 깊은 곳에서 비롯되는 ‘나를 향한 배려’이자, ‘세상을 위한 긍정적 준비’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는 무언가를 결단하기 전 잠시 의식을 천천히 작동시키는 ‘시스템 2’의 중요성을 말한다.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의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에 따르면, 뇌는 직관적이고 빠른 사고인 시스템 1과 느리고 신중한 사고인 시스템 2가 함께 작동한다. 우리는 빠른 결단으로부터 얻게 되는 만족감이나 스릴에 매혹되지만, 중요한 선택일수록 느린 생각을 통해 신중한 결론에 이르는 길이 더 안전하고 깊이 있는 길임을 배운다.


책 속 인생의 조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당장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발을 우선 내딛기보다, 발을 내딛을 지반이 견고한지 살펴라.” 그렇게 머물러서 바라보는 시간이 결코 도망가는 시간이 아니라고. 오히려 흔들림 속에서 단단함을 골라낼 줄 아는 힘을 길러준다고. 신중함은 반드시 두려움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느긋한 숨 고르기다.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디딜 때조차, 신중함이라는 마음의 속도를 동반한다면 발자국에 담긴 자신감은 한층 빛을 발할 것이다.


삶의 매 순간을 차근차근 음미해 보자. 예상치 못한 길목 앞에서 속도를 줄이고, 우리가 서 있는 땅의 촉감을 손끝으로 느껴본다면, 비로소 우리의 내면은 불안 대신 확신을 채워갈 수 있다. 신중함은 삶을 흐르는 강물 위에 놓인 작은 돌다리다. 급류가 우리를 덮치려 해도, 하나하나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는 진중한 태도가 결국 건너고자 하는 곳까지 안전하게 이끌어 줄 것이다. 그리고 돌다리를 지난 어느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한결 더 깊고 풍요로운 스스로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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