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는 말 뒤에 숨겨진 고독의 외침
그는 또 병원에 왔다. 이름이 낯익을 만큼 자주 또 다른 통증을 호소하며 응급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곳저곳을 찢고 꿰매고 감싸고 고쳐도 그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검사 결과는 언제나 정상이었고 설명은 논리적이었지만 어딘가 어긋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를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의료진은 알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고통은 몸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뮌하우젠 증후군(Münchausen Syndrome). 그것은 ‘꾀병’이나 ‘과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가장 왜곡된 방식으로 터져 나오는 절박한 감정의 표현이다. 고통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아픔을 보여줘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뮌하우젠 증후군의 핵심은 ‘타인의 관심’이다. 그러나 관심은 주목이 아니다. 어린 시절 아플 때만이 유일하게 돌봄을 받았던 기억. 부모의 손길, 따뜻한 말 한마디, 식지 않은 죽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함이 ‘아픔 = 사랑’이라는 공식으로 내면에 각인된 채 성장한 사람들. 그들에게 ‘건강한 나’는 외면당한 자아이고 ‘아픈 나’는 유일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병원이라는 무대 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자신을 환자로 설정한다. 진단을 받아도 낫지 않는 병, 설명되지 않는 상처, 아무리 치유해도 멈추지 않는 고통. 뮌하우젠 환자들은 스스로 주사를 놓고 약을 과다복용하고 심지어 수술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들은 고통을 조작하지만 행위의 동기는 절대로 가볍지 않다. 그것은 관심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려는 절박한 시도다.
진료실을 찾는 환자가 의외로 많은 병력을 늘어놓을 때 정신과 의사는 질문보다 마음을 기울인다. ‘왜 이토록 아프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질문은 반드시 환자의 기억 속 어딘가로 이어진다. 대개는 유년기의 정서적 결핍, 방임, 또는 학대의 경험이 뒤따른다. “누구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어요.” “아플 때만 엄마가 나를 봐줬어요.” 그런 말들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꾸며낸 병이 아니라 그들이 견뎌온 현실이다.
뮌하우젠 증후군은 연극이다. 그러나 연극은 주목받고 싶은 욕망보다 이해받지 못했던 과거의 회상에 가깝다. 그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여기 있어요.” “나도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몸의 상처가 가짜일 수는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외로움은 철저히 진짜다.
이 증후군의 치료는 어렵다. 그것은 증상의 제거가 아니라 상처받은 자아를 재건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무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이야기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고통을 ‘꾸며내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느낀다.
심리치료는 그들에게 묻는다. “아프지 않아도,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고 느낀 적 있나요?” 질문은 새로운 관계 맺음의 시작이 된다. 점차 그들은 ‘아픈 자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음을 배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심하고 진심 어린 ‘정서적 안전지대’가 필요하다.
뮌하우젠 증후군 환자들은 진료실에서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때로는 가족 안에서 숨어 있다. 그들을 향한 조롱과 비난은 증상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이면의 정서다. 그들은 ‘관심을 끌려는 사람’이 아니라 ‘잊히지 않기 위해 아픈 척하는 사람’이다. 외침은 너무 오래 무시당했고 그래서 점점 더 요란해진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진짜 고통을 놓친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와 증상만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삶과 마음을 외면한다. 뮌하우젠 증후군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의 고통을 정말로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질문은 의사나 치료자를 향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라는 말 대신
그들은 말없이 아프다.
상처는 가짜일지 몰라도
마음만은 철저히 진짜다.
은파랑